봄날이 짙어질 때 그것은 라일락꽃 향기

라일락꽃 풍경이 있는 골목들

등록 : 2019-04-25 15:03
봄날은 라일락꽃 전후로 나뉜다

봄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길모퉁이에 피어나는 라일락꽃은

그래서 더욱 고혹적이다

조계사 수수꽃다리

봄은 라일락꽃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꽃을 완성하는 향기, 생김새, 빛깔이 조화를 이룬 라일락꽃이 봄의 절정이다. 그로부터 봄은 깊어진다. 라일락꽃은 어느 집 담장 안, 골목 어귀, 길모퉁이에 피어난다. 무리 지어 피지 않는 라일락꽃은 그래서 더 매혹적이다. 꽃말 ‘첫사랑’처럼 아련하다. 라일락꽃 핀 풍경을 찾아서 깊은 봄으로 다녀왔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가래여울마을 라일락꽃이 피는 집

가뭄이 길어져 물이 얕아지면 여울을 건너기도 했다. 마을 앞 강가에는 가래나무가 많았고, 반짝이는 여울이 아름다워 마을 이름도 가래나무와 여울을 뜻하는 ‘추탄’(楸灘), ‘가래여울마을’(강동구 강일동)이다.

가래여울마을 라일락나무

그 ‘강마을’에 어느 해부터 라일락꽃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3대를 이어 가래여울마을에 살고 있는 어느 집에 늙은 라일락나무가 올해도 꽃을 피웠다. 오래전 어머니가 젊으셨을 때 줄기가 제법 굵은 라일락나무를 직접 심으셨다고 말하며, 라일락나무 이야기를 시작한 장성한 아들은 병석에 계신 늙으신 어머니 걱정을 하며 연보랏빛 라일락꽃을 바라본다.

한 아름 가득 안길 것 같은 나무 밑동, 갈라진 줄기 중 하나가 제 무게를 가누지 못하고 늘어져 옆으로 자랐다. 나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담장의 일부가 허물어졌다. 그 줄기를 받친 굵은 쇠파이프가 무슨 지팡이 같다. 집도 사람도 라일락나무도 서로를 의지하며 산다.

담장 밖으로 자란 라일락나무는 해마다 봄이면 골목길에 향긋한 꽃그늘을 만든다. 높은 가지에서 피어난 꽃은 지붕을 덮었다. 지붕 낮은 오래된 집을 새봄이 포근하게 덮었다.

봄밤 라일락꽃 향기에 젖어 집으로 가는 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병원 옆 문성한의원 골목으로 올라간다. 중앙대학교 학생들과 주민들의 번잡한 일상을 마주하며 골목길을 올라간다. 일본식 카레돈가스 집 앞 담장에 라일락꽃이 피었다. 색 바랜 보랏빛이 그 골목에 어울린다.

골목길 경사가 가팔라진다. 달동네 고갯마루에 오르기 전 골목길 모퉁이에 작고 낡은 기와집 한 채가 보인다. 그 집 위에 커다란 목련나무가 있다. 목련나무 맞은편, 골목길 건넛집에서 자란 라일락나무가 담장 밖으로 가지를 퍼뜨렸다.

목련나무 가지와 라일락나무 가지가 그 골목 공중에서 만난다. 목련꽃이 지면 라일락꽃이 피어나니 봄에 피어나지만 서로 보지 못하는 처지다. 간혹 기다림에 익숙해진 늦은 목련꽃과 서둘러 피어난 라일락꽃이 만나는 때도 있다. 하지만 갓 피어난 라일락꽃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련꽃을 배웅해야 한다.

밤이 되면 라일락꽃 향기가 짙어진다. 작은 가게가 있는 고갯마루에서 바람이 골목길을 쓸며 지나간다.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골목길을 오르는 고된 하루를 위로해주는 건 봄밤의 진한 라일락꽃 향기다.

절에 핀 라일락꽃(수수꽃다리)

‘부처님 오신 날’을 준비하는 종로구 조계사 마당이 왁자지껄하다. 연등이 마당을 덮어 그늘을 만들었다. 조계사에 있는 나무 중에 수백 년 된 회화나무와 백송이 유명하지만, 그 한쪽 옆에 수수꽃다리도 있다. 80년 정도 됐다고 한다. 종로구는 그 나무에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라는 팻말을 달았다. 수백 년 된 거대한 나무와 화려한 연등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그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는 어느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감싼다.

봉은사 라일락꽃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 라일락꽃도 유명하다. 절 입구를 지나 올라가다보면 기와지붕 한쪽 귀퉁이에 라일락꽃이 보랏빛 얼굴을 빼꼼 내밀고 절로 오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라일락나무는 연회다원 앞 양쪽에 있다. 왼쪽 나무의 가지가 둥그렇게 잘 퍼졌다. 꽃도 풍성하게 피었다. 진한 꽃향기가 차 한잔과 잘 어울린다. 이 봄 도심 속 휴식이 달콤한 이유는 라일락꽃 때문일 것이다.

꽃길을 걷다

서울로7017에 피어난 수수꽃다리

회현역부터 서울역 뒤쪽까지 이어지는 ‘서울로7017’은 꽃길이다. 회현역 쪽에서 걷기 시작하면 목련광장이 먼저 나오고 반대쪽은 장미광장이다. 그 사이에 피어난 꽃 중 수수꽃다리가 으뜸이다. 달콤한 향기 보라색 꽃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도심 빌딩 숲 한가운데에서 그 작은 꽃송이가 하나의 쉼표다. 꽃 옆에 앉은 사람들 얼굴이 밝다.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거울못식당 앞은 라일락꽃밭이다. 커다란 느티나무 연둣빛 신록 앞 보랏빛 라일락꽃이 아른거린다. 꽃 아래 의자가 있지만, 사람들은 앉지 않고 꽃나무 사이로 걷는다. 푸른 풀밭 보랏빛 라일락꽃, 연둣빛 신록이 만든 봄의 뜰 사이로 구불거리는 길이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가면 천 년 전 석탑들이 봄을 맞이하는 석조물 정원이다. 천 년 전 봄을 간직한 석탑들 사이에서 올봄도 깊어간다.

라일락꽃으로 보는 삼청동

종로구 삼청동 산비탈 마을에 피어난 하얀 라일락꽃

한옥과 골목, 예술과 상업이 뭉뚱그려진 종로구 삼청동 골목에도 봄이 깊어진다. 라일락꽃으로 삼청동을 보았다. 종로11번 마을버스 종점에서 칠보사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른다. 칠보사 앞을 지나 골목을 따라 더 올라가면 샘터가 나온다. 조선 시대에 정조 임금에게 진상한 샘물이라는 안내문구가 있다. 거기서 더 올라가면 산동네다. 좁은 골목길을 떨어진 꽃잎이 물들였다. 산비탈 골목 계단 위에 하얀 꽃을 피운 라일락나무가 있다. 다른 꽃과 나무에 섞여 하얀색 꽃이 잘 보이지 않는데, 향기가 도드라진다.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접어든다. 골목 어귀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 아래 노란 민들레꽃 한 송이가 피었다. 낮은 담장 아래 텃밭이 보인다. 바위 위에 담장을 지었다. 바위 틈새에 기와 조각을 끼워 작은 화분을 만들었다. 바위 아래 돌단풍이 피었고 민들레 씨는 하늘을 향해 맘껏 부풀었다.

그 골목에서 내려와 삼청동길을 걷는다. 가정집 담장 위로 하얀 라일락꽃이 얼굴을 내밀었다. 기와집 위로 가지를 퍼뜨린 라일락나무도 보인다. 식당 골목 한쪽에, 간판 옆, 교회 마당에도 라일락꽃이 피었다. 어느 집 대문 옆 화분에는 꺾꽂이한 것 같은 가는 라일락나무가 자란다.

삼청동길을 내려오다가 마지막에 만난 라일락꽃 핀 풍경에 발길이 머문다. 담벼락에 빙그레 웃는 해 그림이 있는데, 하얀 라일락꽃이 해의 머리 한쪽에 얹혔다. 그 바람에 담벼락 해가 깻잎머리를 한 명랑한 중학생이 됐다.

삼청동길 담벼락 그림 위 하얀 라일락꽃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