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80년대가 학창 시절인 어른들은
서울교육박물관에 가보시라
가난했지만 꿈 많았던
그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옛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한 곳. 기념 촬영 포인트다.
1960~80년대가 학창 시절이었던 사람이라면 서울교육박물관에 가보시라. 가난했지만 꿈 많았던 그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당시에는 어렵고 힘들었지만 돌아보면 가슴 찡하게 따뜻해지는 한마디 ‘그땐 그랬지’.
봄 소풍, 가을 운동회
‘봄 소풍 가을 운동회.’ 60~70년대 초등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소풍과 운동회. 김밥과 달걀, 환타와 사이다는 소풍과 운동회 때 먹는 대표 음식이었다.
아이들은 소풍 전날 날씨 걱정이 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밖에 나가 하늘을 확인했다. 엄마들은 새벽부터 김밥을 싸서 아이들 소풍 가방을 준비했다. 장기자랑과 반별 노래자랑에 이은, 소풍의 하이라이트인 보물찾기가 끝나면 소풍의 흥도 잦아들었다.
운동회 하는 날은 가족 잔치 날이기도 했다. 달리기를 잘해서 3등 안에 들면 학용품을 선물로 받았다. 출발신호는 화약을 터뜨리는 총소리였다. ‘오자미’(모래주머니)를 던져서 박을 터뜨리는 시간에는 몇몇 학부모도 운동장으로 나와 아이들과 함께 던졌다. 박이 터지면 박 속에 가득 담긴 색종이가 공중에 뿌려지며 펼침막이 펼쳐졌다. 펼침막에는 “맛있는 점심시간”이라고 적혀 있었다. 김밥과 과일·고기를 담은 3단찬합은 운동회 날의 만찬이었다. 운동장 나무 그늘에 가족끼리 둘러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운동회의 절정은 차전놀이였다. 동체에 올라탄 대장의 지휘로 청군과 백군의 차전놀이 동체는 운동장을 휘휘 돌며 기싸움을 벌인다. 열기가 무르익으면 청군과 백군의 동체 앞부분을 끼워 맞추고 동체를 하늘 높이 밀어올린다. 그때는 구경하는 어른들도 함께 함성을 질렀다.
마지막 응원가는 청군과 백군이 함께 부르는 노래였다. “우리 편도 잘해라, 저쪽 편도 잘해라, 우리들은 다 같은 ○○○○ 어린이”로 끝나는 그 노래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서울교육박물관에 가면 소풍과 운동회 때 벌어지는 다양한 행사나 사람들의 모습을 미니어처로 만든 것을 볼 수 있다. 소풍과 운동회, 생각만 해도 그 시절이 떠오르는데, 그 시절 그 모습의 미니어처를 보니 금세 감정이 이입된다. 아이들과 함께 온 엄마 아빠가 더 신났다.
그림일기, 통지표, 생활기록부
“여보! 이거 봐, 이거! 내가 나온 학교 배지가 있네!” 전시장 가운데 여러 학교 배지와 버클을 모아놓은 곳에서 어른들이 자신이 나온 학교의 것을 보물찾기하는 양 찾는다.
60년대 달동네를 재현한 미니어처에 고무줄놀이하는 여자아이들, 제기 차는 남자아이들, 풀빵장수, 나무 전봇대가 보인다. 리어카에 엿판을 얹은 엿장수 주변에 아이들이 모였다. 엿장수 가위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옛 초등학교 교실을 재현한 곳은 기념 촬영 포인트다. 초등학생 아이와 부부가 교실로 들어온다. 아빠는 선생님이 된다. 옛 나무의자에 아이가 앉는다. 엄마는 옆에서 손뼉을 치며 깔깔대고 웃는다. 그러고는 아이와 아빠를 휴대폰 카메라에 담는다. 교실 뒤에는 옛날에 엄마가 싸주던 도시락 모형이 있다. 옛 생각에 엄마의 도시락이 떠올라 침이 고인다.
1965년에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이동천 어린이는 8월4일 그림일기에 “병이 좀 나서 그 동안 못한 공부를 하였읍니다”라고 쓰고, 책상에서 책을 읽는 그림을 그렸다. 그날 비가 왔는지 일기장 한쪽에 우산이 그려져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물품 중에는 실제로 썼던 것을 기증한 게 꽤 된다. 생활기록부, 통지표, 건강기록부, 교과서, 공책, 연필, 학생발달상황일람표 등 손때 묻은 물건들이라서 한 번 더 읽고 바라보게 된다.
1960~70년대 실제로 가지고 놀던 소꿉놀이 장난감도 기증받아 전시한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주전자, 칼, 프라이팬, 수저, 접시, 그릇, 가마솥 부뚜막 등이 가득하다. 흙으로 밥을 짓고 풀로 반찬을 만들며 놀던 어린 시절 동네 여자아이들이 떠오른다. 누군가 기증한 호출기 ‘삐삐’와 다양한 그림이 그려진 공중전화카드도 옛 시절 추억의 한 토막이다.
풍금을 기증한 사람도 있다. 1970년대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시절, 초등학생이었던 기증자는 아버지가 사온 풍금에 대한 추억이 잊히지 않는다. 가난한 집에 풍금은 생각도 못한 선물이었다. 기증자가 풍금을 치는 것을 엄마 아버지는 좋아했다. 기증자도 엄마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좋아했다. 가족의 행복이 담긴 풍금이 전시장 한쪽에 놓였다.
공부를 대하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읽다
손자손녀와 함께 박물관을 찾은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천막에서 공부하고, 노천에 멍석을 깔고 공부하는 미니어처를 보고 옛이야기를 꺼낸다. “피난 갔다 와서 보니 책상하고 의자가 어디 있어? 집에서 공책 받칠 나무판때기 하나 가져가서 흙바닥에 멍석 깔고 공부했어. 그 어린 나이에 난리 통에도 학교는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몰라.”
일제강점기에 실제로 있었던 ‘국어상용’ 카드제도에 대한 설명과 미니어처에도 눈길이 머문다. 안내 자료에 따르면 1938년 조선어 수업이 폐지되고 모든 학교에서 우리말(조선말) 사용을 금지했는데, 당시에 ‘국어상용카드’라는 게 있었다(이때 ‘국어’는 일본말을 가리킨다). 아침에 담임 선생님이 몇몇 학생에게 ‘국어상용’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나무 카드를 나눠주고, 카드를 받은 학생은 우리말을 하는 사람에게 그 카드를 넘기게 했다. 그 카드를 받은 학생은 수업이 다 끝나면 교무실로 가서 무서운 처벌을 받았다. 온종일 우리말카드를 전달 못한 아이는 화장실 안에 있는 친구에게 물을 뿌렸다. 화장실 안에 있던 학생은 놀라서 갑자기 우리말을 쓰게 마련이었고, 그 친구에게 우리말 카드를 떠넘겨 자기는 교무실 체벌을 면하기도 했다 한다.
조선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교육제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표를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쓰던 공부와 관련된 전시품 앞에서도 발길이 머문다. 밤에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 불을 밝히는 옛 조명기구 중에, 등잔과 호롱의 받침대로 등의 높이를 조절하는 기능이 있는 ‘등가’가 눈에 띈다. 놋쇠로 만든 등잔받침은 ‘유정’이라고 한다. ‘조족등’은 오늘날의 손전등이었다.
붓·벼루·먹·종이를 보관하는 문방가구,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책상인 서안을 비롯해 붓걸이와 먹물을 담아두는 그릇인 묵호도 보인다. 이것들이 공부하는 한 사람 주변에 단정하게 놓여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공부를 대하는 옛사람의 생각을 읽는다. 조선 시대 서당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 앞에서 아이들도 어른들도 웃는다.
박물관 한쪽에서 전시하는 특별전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다’에서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를 살았던 권기옥, 김란사, 김마리아, 남자현, 유관순, 윤희순 등 대한민국의 여성 선각자 6명의 치열했던 삶을 읽는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