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찰청 자리, 기구하고 굴절된 역사의 흔적

유영호의 우리 동네 어슬렁 산책 경복궁 일대 上

등록 : 2019-04-25 15:27 수정 : 2019-04-29 10:56
1935년 미쿠니석탄회사

사원 아파트로 건립됐다가

해방 뒤 내자호텔로 미군 숙소 활용

10·26까지 박정희 주연 행사에

동원된 여성들의 대기 장소

인근 용비어천가 건물, 주시경 집터

건너편 종교교회라는 이름은

‘종침교’라는 다리서 유래


서울서 가장 오래됐던 금천교

1928년 복개 공사 때 묻혀 아쉬워

“역사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따라서 이 글 역시 수많은 사람이 무심히 지나치고 있는 서울의 옛 흔적을 찾아가 과거를 상상하며 현재와 대화하고자 한다. 하지만 옛 모습의 흔적을 찾아 걷는 것이기에 그 지리적 범위는 어쩔 수 없이 일제강점기 경성부와 거의 일치한다. 그렇다 보니 과거와의 대화 내용도 주로 근현대사에 집중된다. 그리고 연재 순서는 제일 먼저 조선의 한양 천도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 가장 중심이었던 경복궁 일대를 시작으로 지금의 종로구 일대를 탐방할 것이며, 그 후는 일제강점기 가장 번화했던 중구와 용산구 그리고 그 밖의 몇 곳을 걸어보며 글로 옮긴다. 그 첫걸음을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시작했다.

경복궁역은 종로구 적선동에 있으며, 그 지명은 주역에 나오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에서 따온 말이다. ‘이웃에게 선을 베풀며 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경복궁 앞인 이곳은 궐외각사, 즉 지금의 관공서가 즐비했기에 이곳에 있는 관료들은 백성에게 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왕조의 통치 철학을 상상할 수 있는 참으로 멋진 지명이다.

경복궁역 근처에는 오랜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7번 출구 바로 앞, 서울지방경찰청 자리는 1935년 미쿠니(三國)석탄회사의 사원 아파트가 건설돼 국내 아파트 문화의 초기를 상상할 수 있던 곳이었다. 이 아파트는 해방과 함께 내자호텔이란 이름으로 주한미군 숙소로 쓰였는데 이곳이 언론에 크게 등장한 것은 1979년 10·26 사건 때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음주 가무에 동원된 여성들이 궁정동 안가로 가기 직전 이곳 커피숍으로 호출되어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을 기다리던 곳으로, 사건 현장에 있던 두 여인의 현장검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둘은 여대생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이다. 심수봉도 가수지만 대학생 신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훗날 김재규의 재판에서 드러난 여러 사실 가운데 하나가 약 200명쯤 되는 여성이 박정희에게 호출을 받았을 때, 대통령에게 가기 전 기다리던 곳이 바로 이 내자호텔 1층 커피숍이었다는 것이다.

그 후 1990년 사직터널이 하나 더 뚫리면서 도로 확장으로 호텔은 헐리고 남은 터에 지금의 서울지방경찰청이 신축됐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미쿠니석탄회사가 이곳에 사원 아파트를 짓기 이전인 1930년 중구 회현동에 지은 3층짜리 아파트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현재 남아 있는 아파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2호선 충정로역 인근 ‘충정아파트’다. 1932년 도요타아파트란 이름으로 지은 것인데, 1979년 도로 확장으로 일부가 잘려나가고 남은 것이다. 6·25전쟁 때는 인민군 재판소로도 쓰였다.

또 서울지방경찰청 남동쪽 방향으로 가까운 곳에 뜻밖의 이름을 가진 두 건물이 우리 시선을 사로잡는다. 첫 번째는 ‘용비어천가’란 거창한 이름을 가진 빌딩으로, 바로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집터에 서 있다. 지금은 한글이 대중화되어 무심히 지나칠지 모르지만, 한글이 창제된 뒤 지금처럼 띄어쓰기를 하게 된 것은 창제 후 434년 뒤인 1877년부터다. 영국 목사 존 로스가 < Corean Primer >(조선어 첫걸음)를 집필할 때 처음 썼고, 이를 <독립신문>을 통해 대중화한 사람이 바로 주시경 선생이다.

그후 1933년 조선어학회는 띄어쓰기를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반영했다. 만약 여전히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면, 한자와 병용하지 않는 이상 ‘서울시장애인복지회’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 ‘서울가서방을구하시오’ 등으로 쓰이며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기고 있을 것이다. 띄어쓰기가 화룡점정이 됨으로써 우리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펄벅)가 되었고,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존맨)이 되는, 그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제프리 심슨)이라는 찬사를 듣게 되었다.

한편 건너편에는 ‘종교교회’라는 맞는 듯 틀린 듯 이상한 이름을 가진 교회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종교’는 우리가 아는 ‘종교’(宗敎)가 아니다. 용비어천가 빌딩과 종교교회 사이의 길은 일제강점기 청계천 상류인 ‘백운동천’을 복개한 도로인데 복개 전에 바로 이곳에 ‘종교’라는 다리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조선 성종대에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기 위한 어전회의가 열렸는데, 당시 형제였던 충정공 허종과 문정공 허침은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음을 걱정해 고민 끝에 사직동에 사는 누이를 찾아 조언을 구했다. 이에 그 누이는 꾀를 내어, 훗날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화를 면키 어려우니 어전회의에 가지 말라고 했다. 이런 누이의 조언에 따라 그들은 궁궐로 가는 이 다리 위에서 일부러 낙마해 다침으로써 어전회의에 참가 못할 구실을 만들었다. 이로써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 자신의 생모 폐비 윤씨 복위 문제로 일으킨 갑자사화(1504) 때, 이 형제는 살아남았다. 허종과 허침의 목숨을 구해준 다리라 하여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와 ‘종침교’라 했고, 세월이 흐르며 ‘종교’로 이름이 줄었다.

선교사 조세핀 캠벨이 1898년에 세운 배화학당에 루이스워커 기념 예배당(1900)을 지었고, 이것이 훗날 두 교회로 독립했는데, 그중 하나가 종교교회다. 다른 하나는 종로구 창성동에 있는 자교교회다. 뿐만 아니라 이 세 곳을 설립한 캠벨의 사택이 사직동에 여전히 남아 있으니, 마치 캠밸사택이라는 엄마와 세 딸이 한 동네에 오순도순 살고 있는 듯하다.

배화여고 설립자인 영국인 선교사 조세핀 캠밸의 집.

배화여고에서 내려오면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가 나온다. 이곳은 본래 ‘금천(교)시장’으로 1968년 사직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 청계천 이북의 무척 큰 시장이었다. 하지만 도로 확장으로 현재의 모습만 남았다. 이것 역시 이 일대가 도시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이제는 재래시장의 역할을 완전히 잃은 채 여행객들의 먹거리촌으로 변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 이름이 금천(교)시장인 것은 바로 경복궁역 2~3번 출구 사이에 고려 충숙왕 때 만든, 당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의 이름이 금천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1928년 물길이 도로로 변하며 매몰되고 말았다.

다음으로 종로구 통의동은 흔히 국내 최고의 백송이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통의동 35번지 2만1094㎡(6381평)가 1910년 경술국치와 더불어 동양척식회사 사택단지로 개발되면서 도시계획에 따라 격자형 택지로 조성되었고, 그 주택들은 해방 후 적산 처리되어 분할 매각되면서 차츰 사라졌지만 도로 형태는 여전히 백 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백송 근처의 몇 집이 외관은 변했지만 일본식 주택 구조의 골격을 유지하며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알리고 있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