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경인선 개통 당시 시발역…화려한 영화는 간데없어
순화동 서대문 정거장 터
등록 : 2019-05-02 15:15
우리나라 최초 철도 노선 경인선
1899년 개통돼 이듬해 전 구간 뚫려
중요한 역치곤 설명이 부족한 푯돌
전차 정거장으로 70년간 명맥 유지
서대문 정거장 장소성은 사라졌지만
정거장 옆에 있던 옛 스테이션 호텔
사진과 기록 남아 옛 영화 짐작해
한국 근대 숙박 시설의 선구
서울 중구 순화동 1-149 서대문 정거장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푯돌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6번 출구에서 100m 떨어진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정문 왼쪽 길가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 본래 2002년부터 경찰청 맞은편 경찰기념공원(의주로 소공원)에 있다가 2015년 11월 지금 자리로 옮겨왔다. 제자리를 찾았다고 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학교 앞이고,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지역이어서 예전에 역이 있었던 번잡한 장소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장소의 인과관계가 살갑게 와닿지 않는다.
푯돌에는 ‘서대문 정거장은 경인선 개통 당시의 시발역이었다. 경인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1899년 9월 인천~노량진 구간이 개통되었고, 1900년 7월 한강철교가 준공됨에 따라 서울~인천 전 구간이 개통되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교통사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역에 대한 설명치곤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경인선 홍보문 같다. 너무나 변해버린 주변 풍경 때문인지 생뚱맞기까지 하다. 인파로 붐비는 인근 서대문역이 서대문 정거장의 화려한 전성기를 말해준다지만 옛 위상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
푯돌 한 개로 달랑 남은 왕년의 서대문 정거장은 한때 당당한 ‘서울역’(Seoul station)이었다. 경부선의 개통과 함께 1915년 남대문 정거장이 남대문역으로 승격되고, 1919년 서대문역이 문을 닫은 뒤, 1923년 남대문역이 서울역이라는 이름을 계승할 때까지 서울의 중심 관문이었다. 서울 최초의 철도역을 자랑하던 서대문 정거장의 퇴락은 한반도를 흐르는 물류와 수송의 중심이 경인선에서 경부선으로 기차를 갈아탄 탓이다.
우리 기억 속에 서대문 정거장은 기차역이라기보다 전차 정거장이다. 1899년부터 1919년까지 기차역이었던 흔적은 지워진 대신, 1968년 철거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까지 70년 동안 시민의 발 노릇을 한 서울 전차의 흥망성쇠를 대변하는 정거장으로 남았다.
정거장이라고 하면 시골의 버스정거장 정도를 연상하지만 서대문 정거장이 생겼을 당시, 정거장을 오가는 기차는 전기와 함께 신문명의 최첨단 상징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열차를 ‘쇠당나귀’ 혹은 ‘전기거’라고 했다. 마차나 가마밖에 없던 시절 스스로 움직이는 기차를 괴물로 여겼을 법하다.
<독립신문>은 1899년 5월27일자에서 “전기거라 하는 것이 대한에 처음 생겨남에 아직도 개명 못 된 인민의 안목에 어찌 구경스러운 물건이 아니라고야 하리요. …구경들 하려고 남녀노소 상하 없이 다투어 타기도 하고 구경도 하는데 어저께 어떤 아이가 또 죽었다는지라. …인민이 달려들어 그 전기거를 짓부시며 불을 놓아 다 태우면서 하는 말들이 ‘전기거에 사람이 많이 상하고 죽고 또 날이 오래 가물고… 점점 못살 지경이니 어찌하면 좋을는지…”라면서 신문물 망국론을 주장했다. 격세지감이 든다.
<근현대사 신문>(사계절출판사) 근대편 근대 7호 2면에는 ‘쇠당나귀 등장-서대문과 청량리 간 전차 개통’이란 제목 아래 “… 1899년 서울, 많은 시민이 동대문 성루와 근처 성벽에 빽빽이 올라 전차 개통식을 구경했다. … 전차는 일본 교토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라고 한다. 고종이 홍릉에 행차하는 것을 보고 미국인 콜브란이 거금 10만원에 이르는 행차 경비를 절감하고 최신 문명의 이기인 전차를 일반 시민의 교통기관으로 이용한다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개통식 행사가 끝나자 황제의 어용 귀빈차를 비롯해 화려하게 장식한 꽃전차 8대에 고관대작, 외국 사신과 관원들, 민간 유력자들이 나눠 타고 동대문에서 출발해 서대문으로 달렸다. 그런데 구경꾼들이 얼마나 신기해하는지 너도나도 가까이서 보려고 몰려드는 바람에 전차는 가다가 멈추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나 전차 개통을 둘러싸고 민심이 뒤숭숭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몇 달 전 동대문 밖에서 전선줄을 끊어 훔쳐간 범인 5명이 체포돼 재판 한 번 받지 못한 채 참수형에 처해졌고, 근래 가뭄으로 수십 일간 비가 오지 않자 사람들 사이에 전차가 구름을 빨아먹어서 날이 가물다는 꽤 그럴싸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라고 열차 개통 당시의 상황을 되살려 정리했다.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인천과 서울 사이가 불과 두 시간 반 거리로 줄었다. 사람들은 인천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이동한 다음, 전차를 갈아타고 서울의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서울 전차는 서대문 인근의 경교(지금의 강북삼성병원)에서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 옆 청량리까지 8.1㎞ 구간을 달렸다. 이어 종로 보신각~남대문~용산까지 이어지는 두 번째 노선도 생겼다. 첫 전차는 창문에 커튼이 내려진 황실용 귀빈차 1대와 개방차 8대가 운행됐다. 정류장이 따로 없어서 선로 변에서 기다리다가 손을 들어서 타곤 했다.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운행 도중 승객이 맘대로 타고 내리다가 사고가 잦았다고 한다.
서대문 정거장의 장소성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정거장 옆에 있던 옛 스테이션 호텔(Station Hotel)의 사진과 기록이 일부 남아 옛 영화를 짐작해볼 수 있다. 스테이션 호텔은 덕수궁 대한문 바로 옆에 지은 팔레 호텔(Hotel du Palais)과 함께 서울의 근대식 숙박 시설의 선구였다. 이름 그대로 서대문 정거장 옆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누구는 ‘역 호텔’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정거장 여관’이라고 했다. 이후 그랜드 호텔, 마전(馬田) 호텔, 애스터 하우스 호텔로 이름이 여러 차례 변경됐다. 한강철교가 준공된 1900년 이후 제물포항에 도착한 외국인이 경인선 열차를 타고 서대문 정거장에 내리자마자 머무는 숙소였다.
1901년 상반기에 우리나라를 찾아와 스테이션 호텔에 투숙한 미국인 여행가이자 영화제작자 버튼 홈즈는 <버튼 홈즈의 여행강의>를 통해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스테이션 호텔로 따라갔는데, 여러 채의 소규모 조선식 가옥이 이어진 곳에다 위치한 조용하고 아담한 여관으로서 (서대문)정거장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는 거리에 있었다. 이곳 주인 엠벌리씨와 그의 부인은 영국 사람으로, 예전에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테이션 호텔을 운영한 엠벌리는 1899년 6월1일 독립신문사의 사장으로 취임한 인물이다. <코리아 리뷰> 1901년 4월호에 “엠벌리는 경부철도의 종착역 바로 부근에 있는 서양식 주택을 확보하였으며, 목하 이것을 외국인 호텔로 개장하고 있다”라고 호텔 개장을 보도했다. 스웨덴 출신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책과함께)에도 “스테이션 호텔은 서구식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나는 멋지고 품위 있는 스테이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대한매일신보> 1904년 8월4일자 영문판과 8월10일자 국문판에 ‘그랜드 호텔’ 광고가 등장하는데, 이전의 스테이션 호텔이라는 설명과 함께 “철도 종착역 인접, 서대문, 서울, 한국 최고의 호텔, 근사한 새 건물, 멋지고 통풍이 잘되는 객실, 훌륭한 요리, 요금 저렴, 선교사 신분과 상주 투숙객에게는 특별요금, 도보로 2분 내 전차 이용, W. H.엠버리 소유주”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러나 1905년 이후 여러 자료에 따르면 이 호텔의 이름과 주인이 대한문 앞 팔레 호텔을 운영하던 프랑스인 L. 마르탱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애스터 하우스의 광고 전단에는 “경부선, 경인선, 경의선 철도의 종착역에서 1분 거리, 투숙객은 서울 종착역인 서대문 정거장에서 기차표 발급이 편리함”이라고 적혀 있다. ‘마전 호텔’이란 마르탱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스테이션 호텔의 후신 애스터 하우스 호텔은 <대한매일신보>의 창업주인 영국인 어네스트 베델(한국명 배설)이 숨진 곳이다. 베델은 1909년 5월1일 애스터 하우스 호텔에서 37세의 나이로 숨졌다. <전차표 사셨어요? 홈즈의 동방 나들이>(미완)에 따르면, 일본이 베델을 악덕 기자로 매도해 재판 후 유죄 판결을 받고 베델이 죽자, 베델의 주 활동 무대였던 애스터 하우스 호텔에 대한 기록도 자취를 감췄다. 호텔 소유주 엠벌리와 마르탱도 마찬가지다. 1920년대 후반기에 찍은 유리건판 자료를 통해 애스터 하우스의 서양식 건물 사진 한 장만 남았을 뿐이다.
서대문 정거장의 장소성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증거는 농협중앙회 마당에 서 있는 500년 묵은 회화나무 한그루다.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즈가 1901년 5~6월쯤 일행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기와집 뒤쪽에 우람하게 자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가 현재 농협중앙회 뒤에 있는 회화나무다. 이 나무는 본래 농업박물관 옆에 있었지만 1986년 대강당을 신축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농업박물관 자리는 옛 김종서 장군의 집터이기도 하다.
옛 영화는 부질없다지만 서대문 정거장 푯돌 주변에 바비앵 호텔이 여러 채 들어서 있고, 푯돌 앞 공터는 신세계 면세점 주차장으로 쓰인다. 서대문 정거장이 있던 순화동은 조선 시대 수레들이 많이 모여 수렛골이었으며, 야간 순찰을 맡아보던 순청이 있던 곳이고, 말을 빌려주는 고마청이 있었다. 서대문 정거장은 은방울 자매의 ‘마포종점’처럼 대중가요로 남지 않은 탓에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워졌지만, 장소의 반복성과 영속성은 살아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l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중구 순화동 이화외고 앞 서대문정거장 터에는 푯돌만 서 있을 뿐 한때 서울역이었던 전성기의 영화를 더듬기 어렵다. 그러나 최근 호텔과 주차장이 들어서 장소성을 잇고 있다.
1915년 철거되기 전 돈의문(서대문)을 통해 전차가 다니는 모습.
매일신보 1940년 3월28일자에 실린 급행전차노선도
서대문 정거장 옆에 있던 스테이션 호텔. 서울을 찾는 외국인이 묵던 최고급 숙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