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분재에 미친 남자의 작은 세상

서울의 작은 박물관 ⑥ 서초구 내곡동 분재박물관

등록 : 2019-05-23 16:06
휘고 굽은 곡선에서 느끼는 힘

인고의 세월이 깃든 압축된 시간

80~90 수종, 수천 점의 분재가 빼곡

김재인 관장이 50년 가까이 꾸민 세상

1975년 분재연구소 개설, 2010년 현재

집 사려고 마련한 돈 분재 구매

5년 단위로 13차 분재 계획 세워

얼어 죽을 뻔한 배롱나무 두 번 살려내


분재박물관

80~90 수종, 수천 점의 분재를 볼 수 있는 분재박물관이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분재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일군 삶의 터전이자 그의 인생 자체다. 나무를 통해 인생을 배웠다는 그의 남은 꿈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 사람이 분재를 통해 행복한 삶을 꾸려가는 것이다. 분재박물관 너른 마당 곳곳에 그와 함께 살아온 행복한 나무들이 있다.

곁에 두고 싶은 자연, 분재

곡선은 강하다. 휘고 굽은 곡선에서 힘이 느껴진다. 휘어지고 뒤틀리며 자라는 나뭇가지에서 압축된 시간을 본다. 밀도 높은 인고의 시간이다. 터질 것 같은 침묵은 뿌리부터 쌓인 고행이다. 때로는 그 뿌리마저 드러낸 청빈이다. 애써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빛이다. 그래서 높다. 분재를 곁에 두고 보는 이유일 것이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서초구 내곡동 분재박물관 넓은 마당 곳곳에 진백, 해송, 소나무, 주목, 노간주 등 송백류와 철쭉, 매화, 동백, 수사해당, 장수매 등 화목류(꽃나무), 그리고 모과, 애기사과, 석류, 홍자단 등 과목류(과일나무)와 소사, 느티, 느릅, 단풍, 당단풍 등 잡목류 등 80~90 수종, 수천 개의 분재가 있다.

마당 한쪽에 작은 연못을 꾸몄다. 커다란 돌 위에서 물이 떨어진다. 폭포를 연못에 들였다. 연못 주변 나무들이 모두 분재다. 푸른 생명 사이에 잎 하나 없는 작은 나무가 있다. 5월 하순에 잎 하나 없는 걸 보면 죽은 나무다. 그 나무줄기 아래 푸른 이끼가 보인다. 뿌리를 덮고 있는 것이다. 연못 주변 바위와 돌들마저 나무와 함께 호흡하는 것 같다.

비닐하우스 안에 놓인 여러 분재 가운데 외로워 보이는 작은 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꾸미지 않은 모습이다. 다른 분재처럼 휘어져 감긴 모양도 아니다. 비틀리며 자란 줄기 끝에서 간신히 퍼진 몇 가닥 가지가 전부다. 1년이 100년 같은 나무다.

분재 하나가 독립된 하나의 세계다. 그렇게 홀로 돋보인다. 그런 분재들이 곁을 나누고 이웃처럼 자란다. 때로는 둘이, 셋이, 여러 개의 분재가 서로 겹치고 얽혀 색다른 풍경이 된다. 작은 숲이다. 그 세상을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꾸미고 있는 사람이 분재박물관 김재인 관장이다.

높은 바위 꼭대기에서 향나무가 자란다.

41년 동안 함께하고 있는 향나무 앞에서 향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김재인 관장.

1975년 분재연구소로 시작, 88년 분재박물관 문 열어

“1년 됐지만 50~60년 된 것처럼 표현해야 합니다. 왼쪽 오른쪽 뒤에 있는 가지까지 봐가면서 가지의 수와 방향을 생각하고… 여기서는 곡(곡선으로)을 주면서 낮춰줘야 모양이 잡히지요.” 그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 분재의 모양이 잡힌다.

지난주 토요일 서초구 내곡동 분재박물관에서 진행되는 분재 실습 강의. 김재인 관장은 분재를 만드는 수강생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니며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이야기한다.

그는 1975년 분재연구소의 문을 열고 1978년부터 분재 강의를 시작했다. 1981년 분재 상설전시장을 운영하기 시작해서 1988년 분재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1992년에 사우디아라비아에 분재 작품을 수출했고, 1993년에 프랑스 오를레앙 세계 꽃박람회에 분재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경찰대학 고위정책 과정에서 강의하고 여러 방송 매체에 출연하기도 했다. 2010년 분재박물관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수강생이 만든 분재를 보며 잘한 부분과 고쳐야할 부분을 이야기해주는 김재인 관장. 그의 손에서 분재와 함께한 세월이 느껴진다.

젊었을 때부터 원예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군대에서도 원예 관련 일을 맡아 했다. 그 무렵 원예학을 공부하던 그에게 분재는 필수 조건이었다. 국내에서 분재에 관련된 전문서적을 구할 수 없어 그 분야에서 앞선 일본 책을 사서 탐독하고 실습했다. 그는 대학에서 원예학과를 전공했다. 보통 남자로서 흔치 않은 선택이었다. 그만큼 그 분야가 좋았다.

1975년 서초구 우면동에 처음 터를 잡을 때 일이다. 140평의 터에 건평 20여 평의 집이 48만원에 나왔다. 그가 계획한 일을 하기 위해 그 집이 필요했다. 집에 사정해서 간신히 65만원을 얻었는데, 그 돈으로 마음에 드는 분재 한 점을 샀던 것이다. 그야말로 그는 분재에 미쳐 있었다.

집은 사지 못하고 세를 들어 살게 됐다. 분재는 10년, 20년 한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걸 일본의 분재 문화를 보고 이미 알고 있던 그였다. 그래서 그는 5년 단위로 13차에 걸친 자신만의 분재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인생 계획이기도 했다.

그 계획에 따라 분재연구소를 만들고, 분재 교육도 시작했다. 한국의 분재를 외국에 알리는 일과, 국내 분재의 저변을 넓히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분재에 대한 교육을 계속하고 있다. 분재, 미니특수정원, 특수목, 정원수 가지치기 등 그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이 1천여 명에 이른다.

두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배롱나무, 박물관 입구에서 오가는 이를 반기는 소사나무

50년 분재 인생 이야기를 듣기에 토요일 오후는 턱없이 짧았다. 수십 년 그의 손에 자라고 있는 분재를 보러 그와 함께 분재가 가득한 넓은 마당을 거닐었다. 그는 잎 하나 없이 가지만 남은 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가 두 번 생명을 살린 배롱나무다.

1976년 일이다. 몹시 추웠던 그해 겨울 한남동 부자 동네 정원수로 많이 심었던 배롱나무가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조경 일 하는 사람들에게 들었다. 그들에게 부탁해서 그 나무들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가 알고 있던 지식과 사랑으로 어렵게 나무들을 살렸다. 그렇게 살린 나무들은 다 분양했다. 그리고 남은 한 그루 앞에 그가 멈추어 섰던 것이다. 재작년 추위에 그 배롱나무는 두 번째 동해를 입었는데, 그가 돌보고 돌본 끝에 가까스로 새싹 하나를 피워내더란다.

한파에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긴 배롱나무

마당 한쪽에 연못이 있다. 연못 둘레가 다 분재다. 그중 분재로 보기 드문 진궁을 가리킨다. 연못 옆에 높은 바위가 있다. 바위 꼭대기에 자라는 한 그루 작은 향나무가 고고하다. 향나무 아래로 한 가닥 물줄기가 떨어진다. 작은 폭포다. 향나무 아래 가지를 옆으로 늘어뜨린 분재는 홍자단이다.

그렇게 마당을 한 바퀴 돌아오는 길, 향나무 분재 앞에서 그가 멈춘다. 비슷한 모양의 향나무 세 그루는 41년째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는 푸른 잎으로 겨울을 나는 상록수 중에서도 향나무를 좋아한다. 젊었을 때는 소나무처럼 기상 높게 살고, 늙으면 향나무처럼 맑고 푸근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나무에서 인생을 배웠다는 그의 또 다른 꿈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 사람들도 나무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와 함께 41년을 살고 있는 향나무를 마지막으로 분재박물관을 나서는데, 박물관 입구에 있던 500년 된 소사나무가 배웅을 한다.

500년 된 소사나무.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