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서울살이 꺼린 퇴계…아들에 ‘인서울’ 강조한 다산
중구 서소문동 이황 선생 집터 下
등록 : 2019-05-30 15:30
중앙 관직보다 지방 관직 선호해
“관직 물러나겠다” 20차례 주청
퇴계가 살았던 동네, 북촌에 비해
쾌적한 동네 아니었던 듯
세종 10년 한양 가구 1만6921호 비해
인구는 10만3328명으로 과밀
18세기 선비 일기에 ‘북촌 선망’
퇴계 귀향길 조정 중신 인산인해
중구 서소문동 47의 2 퇴계 이황(1501~1570) 선생 집터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난다.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 앞 한산빌딩 정면에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앉아 있다. 지난 5월17일치 상편에서 서울 중구청 문화관광 웹사이트(www.junggu.seoul.kr)에 서울시립미술관 앞에 표석이 있다고 소개하고, 선생의 한자 이름 ‘李滉’을 ‘二黃’이라고 잘못 표기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했는데, 뒤늦게나마 바로잡아서 다행이다. 하지만 아직 배달용 오토바이들이 푯돌 앞을 가로막고 멋대로 주차하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10년 가까운 서울 관직 생활 중 퇴계가 머문 서소문 안은 어떤 동네였을까. 이 문을 처음에는 ‘소덕문’이라고 하고, ‘서소문’이라고 속칭했다. 1472년 예종비 한씨의 시호를 소덕왕후라고 명명하면서 그 이름을 피해 ‘소의문’으로 바꿨다는 설과 1744년 정조가 문루를 지은 뒤 소의문이란 이름을 내렸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소의문은 광희문과 함께 도성 밖으로 시체가 나가는 시구문이었고, 문 밖은 죄수들을 사형시키는 ‘서소문 참수장’이었다.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태어난 생가터(옛 배제학당)가 있었고,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 수렛골, 도성 순찰을 하는 순라군들을 지휘하는 순청이 있어서 순화동이라는 지명을 각각 낳았다. 중앙일보사 주변, 야동(冶洞)이라는 옛 지명은 풀무간(대장간)이 많아서 생겼다.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인 칠패시장도 이곳에 있었다.
퇴계가 산 서소문 안은 사색당파 가운데 ‘서인’(西人)이 사는 서촌(西村) 양반 동네이긴 하지만 북촌이나 동촌에 비해 그리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용하게 학문하기에는 번잡한 동네였으나, 도포를 기워 입을 정도로 근검절약했던 퇴계가 월세를 내고 살기에는 적당한 지역이 아니었을까? 서울 중앙 관직보다 지방 수령 직을 선호하고, 43세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20차례 거듭한 선생에게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닐 수도 있다.
조선 시대 한성부는 동·서·남·북·중부 5부(部)와 52개 방(坊)의 행정구역을 두고 있었다. 세종 10년(1428년) 한성부 기록에 따르면 서울의 가구 수는 1만6921호이고, 인구는 10만3328명이었다. 선생이 살던 시절 서울의 과밀화는 더 심해졌고, 사대문 안의 주택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세종 8년(1426년) 발생한 대화재로 사대문 안 전체 집의 15%에 이르는 민가 2400여 호가 사라졌다. 대부분의 집이 초가였고,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불길을 잡기 어려웠다. 이후 초가를 기와집으로 바꾸는 집 개량 작업이 벌어졌다. 당시 도로를 침범한 불법 주택이 1만 가구가 넘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서울 토착 일부 관료와 아전(중인), 시전 상인을 중심으로 부동산 투기가 극심했다. 집과 집터가 부족하다보니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 등 내사산 산기슭에 집을 지었다가 풍수 훼손을 이유로 철거된 사례가 <조선왕조실록>에 500여 건이나 나온다.
퇴계가 살던 서소문집은 기와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서울 북촌과 대학로에서 성균관 사이 동촌, 덕수궁 주변 서촌, 필동 일대 남촌이 기와집이고 나머지 지역은 대부분 초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암 박지원의 한문소설 <옥갑야화>에 “허생은 묵적동(묵동)에 살고 있었다. 줄곧 남산 밑에 닿으면 우물터 위에 해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고 사립문이 그 나무를 향하여 열려 있으며 초가집 두어 칸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러나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했고, 그의 처가 바느질품을 팔아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셈이었다”고 남촌 선비의 생활상과 남촌의 풍경을 그렸다.
<북학의>를 지은 초정 박제가는 “4만 호의 기와집이 빽빽이 들어서서 흡사 크고 작은 고기들이 잔잔한 파도를 누비는 것 같다”고 태평성대를 묘사했지만, 과장된 표현으로 여겨진다. 다산 정약용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 중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은 서첩 <하피첩>에 “혹여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한양 근처에서 살며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사대부 집안의 법도이다… 내가 지금은 죄인이 되어 너희를 시골에 숨어 살게 했지만, 앞으로 반드시 한양의 십 리 안에서 지내게 하겠다… 분노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먼 시골로 가버린다면 어리석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칠 뿐이다”라면서 ‘인 서울’을 강조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서울 거주가 출세의 관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의 그림지도인 <동국여도> 중 <도성도>에는 조선 후기 한성부의 주거지 상황이 비교적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그림을 보면 사대문 안은 물론 남대문이나 서대문에 이르는 서남부 지역으로 시가지가 확장된 것을 보여준다. 한강 변에 마을이 분포된 양상도 뚜렷하다. 이 그림의 특징은 집을 기와집과 초가집으로 색깔을 달리 표시한 것이다. 도성 내부에 푸른색의 기와집이 많이 표시됐지만 사대문 밖인데도 일찍부터 시가지화가 진행된 남대문~서소문~서대문 바깥 지역에 기와집이 즐비한 것이 눈에 띈다.
도성도의 묘사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양인들이 남긴 사진 속 풍경과 유사하다. 1894년 서울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인 헤세 바르텍은 저서 <서울, 제2의 고향-유럽인의 눈에 비친 100년 전 서울>(1994년, 서울학연구소)에서 서울을 ‘초가집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지면과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납작한 잿빛 초가들이 옹기종기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으며, 기와집은 가끔 눈에 띄었고 이층집도 없었다고 썼다. 마이클 힐리어가 남긴 1890년 사진에도 무악산(안산) 아래 서대문과 경희궁 사이 새문안 마을에 기와집이 드문드문했다.
남촌 창동(남창동)의 초가집에 산 서울 명문가 선비 유민주가 1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책 <흠영>에 서울의 주택 시세와 집 매매 과정이 잘 드러나 있다. 유민주는 지금의 명동에 100칸짜리 기와집을 2천냥에 샀다. 이 집은 당시 한양 최고가 북촌 380칸 주택의 10분의 1 가격이었고, 전세의 7~8배였으며, 쌀 3천 말 값이었다. 8식구가 25년간 먹을 수 있는 쌀이고, 2천냥은 125개월 치 생활비에 해당했다. 집값의 일부는 친척에게 꾸고 나머지 대부분은 경강상인에게 사채를 얻었다. 계약서와 매매문서, 한성부에서 내려준 매매에 대한 인증서 등이 소상하게 첨부돼 있다.
유민주는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북촌과 동촌, 남촌을 오가며 비교했다. “북동(북촌)이 몹시 아름답다는 것을 또한 느끼게 된다. 밝고 환하고 그윽하니 별세계가 되고도 남는다. …남동(남촌)처럼 초라하고 좁아서 그리 아름답지 못한 곳과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대체로 북동의 주택은 대부분이 새집으로 요즘 사람이 지은 것이고, 남동은 거의 오래된 집으로 옛사람이 지은 것이다. …백동(동촌, 혜화동)도 별세계다”라고 썼다.
유민주가 집을 살 때 오늘의 부동산중개업자에 해당하는 ‘집주릅’의 도움을 받았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기록돼 있다. 집주릅은 집을 소개하고 거래를 알선하며 집을 점검하고 도면을 작성하며 가격을 흥정하고 매매문서를 작성했다. 일기를 보면 집주릅이 갑자기 값을 올려 거래를 틀거나, 농간을 부리는 일이 나온다. 신분은 중인이거나 상민이지만 재물 앞에서는 신분도 맥을 추지 못한다. 유민주는 집주릅에게 담배를 선물하고 호의를 보이면서, 거래에 능수능란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곤 했다.
퇴계는 1569년 사직 상소를 몇 달에 걸쳐 올린 끝에 선조에게 낙향을 허락받는다. 귀향길에 조정 중신들이 한강까지 나와 전별하는 바람에 귀향길이 지체돼 동호(옥수동)에서 하루, 한강 건너 봉은사에서 또 하루를 묵은 뒤 광나루(광진)에서 관선을 타고 충주까지 갔다. 이어 청풍에서 말을 타고 단양~죽령~풍기~영주~도산서원까지 뱃길과 육로로 320㎞를 갔다.
이듬해 12월 숨지기 사흘 전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가르침이 올바르지 못했다고 자책하면서, 사후 상례와 석물을 화려하게 하거나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만 돌의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새기도록 유언했다. 4언 24구 96자의 묘비명을 남겼다. 다른 사람이 쓸 경우 미화하거나 과장할 것을 염려해서다. 율곡 이이는 “물어볼 데를 잃고 부모를 잃었다”는 제문을 남겼다.
글·사진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19세기에 제작된 지도책 <동국여도> 중 ‘도성도’. 도성이 사대문 밖으로 확장된 것이 뚜렷하며, 기와집은 푸른색, 초가는 붉은색으로 표시한 것이 특징이다
서울 남산에 있는 퇴계 이황 동상. 퇴계로라는 가로명을 남겼다.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한 마이클 힐리어가 남긴 새문안 마을 사진, 안산(무악산)과 경희궁 사이에 기와집들이 눈에 띈다.
퇴계 선생이 직접 지은 묘갈명 탁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