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꿈꿨던 인내천의 세상, 그대들은 보는가

드라마 <녹두꽃>을 보며 서울 동학 기행

등록 : 2019-06-07 15:15
핍박과 학정을 뚫고 나온

농학농민군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전봉준·최시형·손병희·방정환 등

동학과 천도교의 의기가 서린 곳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앞에 자리잡은 녹두장군 전봉준 상. 부릅뜬 두 눈에서 뿜어져나오는 눈빛이 형형하다.

핍박과 학정을 뚫고 활화산처럼 터져나온 동학농민군의 함성이 횃불로 번지던 1894년 조선, 부패한 정치권력과 벼슬아치를 몰아내고자 했던 그들의 이야기가 상징처럼 남아 있는 곳을 돌아본다. 그곳에는 어린이 인권 운동에 앞장섰던 소파 방정환, 동학농민군의 대장 녹두장군 전봉준, 동학 제2대 교조 최시형, 제3대 교조 손병희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수많은 사람의 의기가 서려 있다. SBS 방송에서는 마침 농학농민전쟁을 다룬 드라마 <녹두꽃>(금·토 밤 10시)을 방영해 동학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종각 네거리에 앉아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보신각에서 울려퍼진다. 거리를 메운 사람들이 강물처럼 넘실대는 종로구 서린동 종각 네거리 한쪽 모퉁이에 꿈쩍 않고 앉아 있는 한 사람의 상, 부릅뜬 눈 앞에 펼쳐진 세상으로 6월의 햇살이 작살같이 내리꽂힌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그렇게 사람의 물결 속에서, 언젠가 보았던 사진 속 그 모습 그 눈빛으로 다시 살아났다.

2018년 전봉준의 상을 종각 네거리에 세웠다. 앞면에 “녹두장군 전봉준”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뒷면에 새긴 글의 첫 부분, “동학농민군의 함성은 1894년 이 강산을 뒤덮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지휘한 동학농민군은 부패한 벼슬아치를 몰아내고 폐정을 바로잡기 위해 봉기하였다.”

1894년 12월 전북 순창에서 옛 부하의 밀고로 전봉준은 체포된다. 정읍에 있는 동학농민군 총사령관 김개남 장군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순창에서 체포된 전봉준은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처형당했다.

전봉준 상이 있는 영풍문고 앞은 조선 시대 전옥서 자리였다. 전옥서는 죄인을 가두던 감옥이다. 조선 말에는 항일 의병들이 옥고를 치렀다.

최시형 순교터 푯돌

종각 네거리에서 종로3가 전철역 쪽으로 걷는다. 종로3가 네거리에서 왼쪽으로 돌아서서 조금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푯돌이 보인다. 1907년 세워진 극장 단성사 터를 알리는 안내판 옆에 “최시형 순교터’ 푯돌이 있다. 동학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이 동학혁명을 지도하다가 순교(1898)한 터”라고 새겨졌다.

최시형은 동학 제1대 교조 최제우가 처형당하기 전해인 1863년에 제2대 교조가 되었다. 최제우가 포교를 시작한 해가 1861년이었으니 동학의 세가 완전하게 자리잡지 못한 때에 최시형이 2대 교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으니 그 세월 동안 동학의 세를 넓힌 중심에 최시형이 있었다.

손병희와 천도교 중앙대교당

최시형 순교터 푯돌을 뒤로하고 골목길을 걸어서 탑골공원에 도착했다. 탑골공원에서 삼일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걷다보면 길 왼쪽에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나온다. 종로구 경운동 88번지는 천도교 중앙대교당과 수운회관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소파 방정환의 이야기가 남아 있다.

수운회관 입구 왼쪽에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비석 뒤에 “어른이 어린이를 내리누르지 말자. 삼십 년 사십 년 뒤진 옛사람이 삼십 년 사십 년 앞 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1930년 7월 어린이인권운동가 방정환”이라고 새겼다.

‘어린이는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할 인격이고 민족의 앞날을 이끌어갈 사람’이라는 그의 생각의 뿌리는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닿는다.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비석. 그 뒤에 수운회관.

보국안민(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과 광제창생(널리 백성을 구제함)의 뜻으로 일어선 동학이 1905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다. 당시 천도교 교조는 손병희였다. 그리고 손병희의 사위가 방정환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평등하다는 천도교의 사상을 방정환은 어린이 운동으로 펼친다.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만들고 전국순회강연을 한다. 1922년 5월1일 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어린이날’을 선포한다. 1923년 월간지 <어린이>를 발행한다. <개벽> <어린이> <별건곤> <신여성> <학생> 등 여러 매체에 다양한 필명으로 수백 편의 글을 발표했다.

수운회관 건물 옆에는 천도교 중앙대교당이 있다. 1918년에 공사를 시작해 1921년에 완공한 건물이다. 공사 중간에 건축비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공사가 늦어졌다는 일화가 전한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물.

봉황각

천도교 중앙대교당을 보고 나와 안국역 사거리로 간다.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길 왼쪽에 헌법재판소가 있다. 헌법재판소 안에 600년 된 백송(천연기념물 제8호)이 있다. 다음 답사지로 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 간다. 정문 안내소에서 출입증을 받고 들어가볼 수 있다.

헌법재판소를 나와 가던 방향으로 직진하면 가회동사무소가 나온다. 가회동사무소 옆에 손병희가 살던 집터를 알리는 푯돌이 보인다. 손병희는 1897년에 동학 제3대 교조가 되었다. 3·1운동 때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다.

손병희 선생 집터 푯돌

푯돌을 보고 골목으로 직진하면 길 오른쪽에 백인제 가옥이 있다. 옛 한옥 건물의 운치를 느끼며 잠깐 쉬었다 마지막 답사지인 봉황각으로 출발한다.

안국역 네거리에서 길을 건너 창덕궁 쪽으로 가다보면 ‘창덕궁, 서울돈화문국악당’ 시내버스 정류소가 있다. 151번 버스(우이동·도선사 입구 방향)를 타고 종점에 내리면 ‘봉황각’ 쪽으로 가는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650m 정도 걸으면 봉황각이 나온다.

백인제 가옥

백인제 가옥 사랑채

봉황각은 천도교에서 1912년에 세운 수련장이다. 당시에는 ‘의창수도원’이라고 했다. 1912년에는 봉황각과 내실, 부속 건물을 지었고, 이듬해에 12칸짜리 수련 도장을 지었다. 수련도장은 3·1운동 이후 일제가 헐었다.

손병희는 종교 수련을 통해 일제가 침탈한 국권을 회복하고자 봉황각을 세웠다. 봉황각 앞 붉은 벽돌 건물은 천도교 중앙대교당 건물과 함께 1921년에 지은 천도교 종학대학원 건물이다. 1969년에 새 수운회관을 지으며 지금의 자리에 옮겼다. 천도교는 봉황각에서 1912년부터 1914년 사이에 일곱 차례에 걸쳐 483명의 천도교 지도자 교육을 했다. 그들은 3·1운동을 준비하고 거행하는 큰 역할을 했다. 봉황각 옆에 손병희의 묘가 있다.

봉황각 기와지붕 뒤로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가 보인다. 북한산 깊은 골짜기에서 수련하던 그 사람들을 그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작살같이 내리꽂히던 햇살은 순해지고 지나가는 바람이 선선하다.

봉황각. 기와지붕 뒤로 북한산 백운대와 인수봉이 보인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