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중 나만 못 구했던 인턴 자리…막판 구제받다

권은중의 나이 쉰에 떠난 이탈리아 요리 유학기 ⑦ 실습 레스토랑 인턴 자리 구하기의 어려움

등록 : 2019-06-13 15:33
채식·해산물 요리 배우겠다는 일념

해산물 요리는 남부에서 발달하고

채식 요리 전문은 많지 않아 꿈 포기

시간 없고 선택지는 좁아져 초조

나를 구원해준 것은 수업 시간

초청 셰프의 특이한 파스타에 홀려

수업 끝난 뒤 인턴 의사 밝히자

그 자리에서 수락 의사 “후유”


6월부터 인턴 실습을 시작하게 된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 베툴라(La Betulla)의 모습.

레스토랑이 있는 토리노시 자베노는 알프스 근처에 있어서 눈 덮인 산과 호수를 볼 수 있다.

졸업을 한 달 앞둔 5월 초부터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 학생들은 바쁘다. 5월 말 졸업과 함께 현장 실습을 나갈 레스토랑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길면 8개월을 머물러야 하는 레스토랑을 선택하는 일은 10주가량인 학교생활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세계 어느 나라나 모두 요리는 사실상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도제 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어떤 셰프를 만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요리가 달라질 수 있다.

학생들이 인턴 근무 레스토랑을 결정하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유명 셰프가 학교 수업에 특강을 오는 때다. 대부분 셰프들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요리 철학과 최신 이탈리아 음식의 트렌드를 강의한다. 이때 각 셰프의 개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셰프마다 정말 다르다. 같은 메뉴는 하나도 없으며 같은 방식의 요리도 없었다. 어떤 셰프는 전통을 강조하는 반면 어떤 셰프는 최신 트렌드를 뽐낸다. 학교 수업 중에서 가장 재미있던 시간이었다.

셰프들은 세계 각국에서 온 학생들 앞에서 자신만의 개성과 철학이 묻어나는 요리를 코스로 내놓는다. 이런 과정을 보면서 학생들은 초청 셰프의 요리가 자기가 배우고 싶은 요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학교를 통하거나 혹은 직접 셰프에게 지원 의사를 밝힌다. 셰프가 승낙하면 그 레스토랑 인턴으로 가는 것이다. 한국인 동기 8명 가운데 3명이 이런 과정을 거쳐 미슐랭 원스타 레스토랑 인턴으로 나갔다.

두 번째는 특강이 아니라 정규 수업의 초청 강사로 오는 셰프를 만나는 경우다. 학교는 파스타, 제빵, 초콜릿, 생선 요리, 피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셰프를 초청한다.

마지막은 이미 한국 학생을 받아본 적 있는 레스토랑을 학교나 한국인 통역 선생님이 연결해주는 방식이다. 한국 학생 한 명과 일본 학생 한 명이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에 이렇게 인턴을 나갔다.

학생들이 무조건 미슐랭 별만 중시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경력을 쌓기 위해서는 명성도 중요하지만 레스토랑의 위치 혹은 숙소 조건도 고려 대상이다. 여학생들에게는 레스토랑이 대중교통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지도 중요했다. 매번 시내에 나갈 때마다 비싼 택시를 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5월부터 부지런히 학교 주변 레스토랑을 다녔다. 음식도 맛보고 주방도 보고 숙소도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학교가 미리 셰프에게 연락해줘 우리는 특별한 가격에 음식과 와인을 즐길 수 있었다. 5만~6만원으로 미슐랭 레스토랑의 음식을 풀코스로 맛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꽤 값나가는 바롤로나 바르베르스코 같은 적포도주도 이때 마셔볼 수 있었다.

셰프를 처음 만나러 레스토랑에 갔을 때 셰프가 차려준 음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았던 아스파라거스 타르트. 담백하면서도 진한 맛이었다.

그러나 나는 인턴 레스토랑을 고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탈리아에 올 때 나는 채식 또는 해산물 요리를 배우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직 낯설지만 미국과 독일 등에서는 채식 요리가 발달했기 때문에 비슷한 문화를 가진 이탈리아에서도 이런 트렌드를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기대와 달리 채식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보다도 없는 것 같았다. 실습 레스토랑을 추천해주는 학교 담당자인 엘리자는 “미안해 가브리엘, 이탈리아 사람은 채식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했다(가브리엘은 내 세례명이자 이탈리아 이름이다).

해산물 레스토랑은 시칠리아나 풀리아 같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발달했는데 학교가 이곳에 가려는 나를 만류했다. 실습을 시작하는 6월부터 이 지역 레스토랑은 새벽 2~3시까지 영업하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내가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여름 성수기가 끝나는 10월 이후에 가는 것이 좋으니 그때까지 학교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인 ‘바르베라’에서 일할 것을 권했다.

나이와 체력을 문제 삼는 학교에 발끈하고 싶었지만, 학교 수업도 견디지 못하는 저질 체력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인턴들로 꾸려지는 학교 레스토랑은 대안이 못됐다. 학교 레스토랑의 메뉴는 수업 시간 과정과 거의 비슷했다. 참치로 속을 채운 송아지 고기, 완두콩 크림 리소토 등은 이미 여러 차례 만들어서 새로울 것이 없었다.

결국 졸업을 코앞에 둔 5월 말에도 동기 대부분이 실습 장소를 결정했는데 나만 결정하지 못했다. 시간은 없고 선택지는 좁아지고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작 3개월 학교 수업만 듣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초조해하는 나를 구원해준 것은 수업 시간이었다. 파스타를 기계가 아닌 손이나 칼로 빚는 특이한 파스타들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이 가운데 제노바가 있는 리구리아주 산골의 파스타가 내 관심을 끌었다. 면을 계속 손으로 비벼서 양 끝을 기다란 고깔 모양으로 만드는 ‘트로피에’라는 파스타였다. 강원도 올챙이국수를 연상하게 하는 파스타였는데, 기계로 만들던 생면 파스타와는 달리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이날 세 가지 파스타를 만들었는데 파스타 이름도 지역 사투리를 써서 독특했을 뿐 아니라 맛도 특색이 있었다. 이탈리아 전통 요리의 저력을 다시 한 번 느꼈던 순간이었다.

트로피에는 손으로 비벼서 만드는 토속적인 파스타인데 이탈리아에서 먹어본 것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음식 가운데 하나였다. 이 파스타 덕분에 인턴 레스토랑을 결정할 수 있었다.

이날 강의를 했던 초청 셰프는 프랑코였는데 그는 이미 이탈리아 각 지역의 전통 디저트와 생면 파스타 강의를 한 바 있다. 첫인상은 딱딱해 보이지만 친절하고 자상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생면 파스타 수업 시간에 내가 만든 음식에 “브라보!”라고 격려해주었던 몇 안 되는 셰프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탈리아 각 지역 빵과 파스타를 많이 알고 있는 그에게서 이탈리아 음식 문화를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프랑코에게 가서 인턴을 요청했다. 그 역시 나를 좋게 보았는지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 한 달가량 계속됐던 고민이 너무 쉽게 풀리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6월 첫 주부터 토리노 인근 자베노에 있는 ‘라 베툴라’(자작나무)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인턴 첫 출근 하는 날. 아무도 없는 주방에서 셀카를 찍어봤다

글·사진 권은중 <독학 파스타>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