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성의 LP 이야기

‘고래사냥’ ‘왜 불러’ ‘날이 갈수록’ 3곡 동시 히트

대중음악과 영화의 공생 100년, 70~90년대 편

등록 : 2019-06-20 15:28
75년 하길종 감독 <바보들의 행진>

젊은이들 대변 노래 연속 히트

<별들의 고향> <어제 내린 비> 등

70년대 히트작들 주제가도 인기

1970년대의 중요 한국 영화음악이 수록된 LP들.

지금의 한국 영화계는 영화음악의 중요성을 알기에 제작비를 아끼지 않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기존에 발표된 히트곡이 주제가나 배경음악으로 이 영화 저 영화에 쓰였던 이유다. 대사와 음향이 빠진 러시 화면조차 보여주지 않고 시나리오만 가지고 음악을 만들었다니 최악의 제작 환경이었다. 하지만 1970~80년대 중요 한국 영화를 통해 시대의 아이콘으로 평가받는 주옥같은 주제가들이 탄생했다. 기적 같은 일이다.

1970년대는 60년대의 라디오드라마처럼 TV드라마와 주제가가 히트되면 영화로 제작되는 트렌드가 이어졌다. 이미자가 주제가를 불러 TBC 방송가요대상과 청룡영화상 주제가상을 받았던 최인현 감독의 <아씨>(1970)와 바보 영구 연기로 화제를 모은 장욱제의 TV드라마를 스크린으로 옮긴 김기 감독의 <여로>(1973)가 대표적이다.

1970년 개봉한 정인엽 감독의 영화 <먼 데서 온 여자>의 주제가는 한상일의 ‘웨딩드레스’다. 이 노래는 제목과 가사, 가수는 같은데 정풍송과 길옥윤 2명의 작곡가에 의해 전혀 다른 멜로디로 발표된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영화의 원래 제목은 <웨딩드레스>였지만 흥행을 이유로 <먼 데서 온 여자>로 제목이 야릇하게 변경되었지만 주제가만 살아남아 결혼 시즌의 명곡이 되었다.


1971년 개봉한 국내 최초의 하드보일드 영화인 박종호 감독의 <들개>는 인기 가수 정훈희가 신성일과 파격적인 정사 신을 벌여 흥행에 성공했다. 배우 신성일이 연출한 영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은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국판 같다. 관람객 수가 14만 명에 근접하는 흥행 성공의 이 영화에서 포크 가수 김세환은 주제가 ‘목장길 따라’의 히트로 인기 가수의 발판을 마련했고, 작곡가 이봉조는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주제가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 필름은 분실되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이별>은 관객 15만 명을 동원하며 1973년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주제가 가사처럼 작곡가 길옥윤과 패티김의 이혼이 화제가 되어 흥행에 한몫했지만 ‘아시아의 연가’로 평가받는 주제가의 몫도 무시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통제와 검열이 극에 달했던 1974년과 1975년에 중요한 한국 영화와 영화음악들이 대거 탄생했다. <별들의 고향>이 1974년에, 1975년엔 <바보들의 행진> <영자의 전성시대> <어제 내린 비>가 연속 개봉하며 청년 세대의 억눌린 심정을 대변했다.

관객 46만 명을 동원한 <별들의 고향>은 이장호 감독의 출세작이다. 강근식 음악감독은 주제가 일변도였던 한국 영화음악에 전자기타와 무그 사운드를 선보여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이장희가 부른 주제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젊은 세대에게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윤시내가 목을 조르며 소녀 목소리를 연출한 주제가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도 가수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키며 흥행에 일조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OST 초반은 영화 속 정사 장면으로 장식된 재킷이 ‘퇴폐적이다’라는 이유로 판매 금지가 되었다.

송창식의 명곡 ‘고래사냥’ ‘왜 불러’ ‘날이 갈수록’이 전편에 흐르는, 1975년 개봉한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암울한 시대 현실을 자조적이면서도 경쾌한 방식으로 풀어낸 1970년대 최고의 한국 영화다. 주인공 병태의 친구 영철이 ‘고래사냥’이 흐르는 가운데 자전거를 타고 동해 바다 절벽 위에서 파란 바다로 뛰어드는 장면과 영자가 입영열차 창문에 매달려 키스하는 장면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주제가를 부른 송창식은 대마초 파동으로 요동치는 정국에서 살아남아 MBC 가수왕에 등극했다.

15만 관객을 동원한 이장호 감독의 <어제 내린 비>는 흥행과 작품성, 음악까지 좋았다. 정성조 음악감독은 감각적인 사운드로 이 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36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김호선 감독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는 1975년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던 시대의 아이콘이다.

‘창녀의 치마 속을 통해 본 1970년대의 암울한 한국 사회’를 영상으로 전했던 이 영화의 주제가는 임희숙이 내면을 울리는 솔(소울) 창법으로 노래했다. 주제가들은 금지당해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했지만 정성조 음악감독이 들려준 탁월한 사운드는 주제가 일변도의 한국 영화음악에 일대 파장을 몰고왔다.

이영표 감독의 영화 <미인>에서 명곡 ‘미인’은 삭제되고 여배우 김미영과 신중현의 키스신은 살아남았다. 이 영화의 작품성은 떨어지지만 신중현의 최전성기 연주를 컬러 영상으로 볼 수 있어 매력적이다. 70년대 중후반에는 하이틴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김인순이 가장 많은 주제가를 불렀다.

1976년 개봉한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브이>도 최호섭이 부른 주제가가 흥행에 한몫했다. 1977년 김호선 감독의 <겨울 여자>는 58만6천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 흥행 신기록을 새로 썼다. 김세화의 주제가 ‘눈물로 쓴 편지’와 이영식과 함께 부른 ‘겨울 이야기’는 겨울 시즌 송의 명곡이 되었다.

1970~80년대 한국 영화는 군사정부의 통제가 심해 체제나 사회현상을 비판하고 고민하는 작품보다는 <애마 부인> 등 쾌락적인 섹스 영화의 범람으로 영화 본연의 힘을 상실한 암흑기였다. ‘한국 영화는 3류’라는 등식이 형성되는 순간이다.

소재가 제한되자 대안으로 인기 가수들을 대거 영화에 출연시켰다. 남진의 <가수왕>, 패티김의 <속 이별>, 하춘화의 <숙녀 초년생>, 백영규의 <슬픈 계절에 만나요>, 조용필의 <그 사랑 한이 되어>, 나훈아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주제가 ‘하얀새’) 등은 그런 류의 영화들이다. 작품성이나 흥행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1980~90년대 중요 한국 영화주제가들이 수록된 LP들.

1989년 개봉한 이남이 주연의 <울고 싶어라>의 364명, 김흥국 주연의 <앗싸! 호랑나비>가 기록한 181명의 관객 수는 쉽게 깨지지 않을 최소 관객 기록이다. 전영록, 김수철, 임창정, 엄정화, 이상은 등 예외도 있었지만, 가수들이 주연으로 등장한 영화의 흥행 실패는 한국 영화의 징크스로 남았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년)는 남도소리와 아름다운 사계로 103만 관객을 매혹시켰다.

18편의 1천만 관객 영화를 배출한 한국 영화는 일상생활처럼 한국인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시작은 미미했고 여전히 힘든 현실이지만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에 점령되지 않은 극소수 나라의 영화로 성장과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글·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ㅣ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