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홀몸어르신, 색칠에 빠지다
색칠 그림책으로 방문형 미술 활동 기획한 자양4동주민센터 김남영 주무관
등록 : 2019-06-20 16:05
캔버스+고형물감 1만원으로 저렴
전문가 없이도 복지플래너 쉽게 지도
그림 그리며 우울 딛고 의욕·창의적
작은 전시회…“내 그림 맞아?” 뿌듯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 조금씩 그리다보니 너무 재미나서 이런저런 근심 걱정이 절로 없어지더라고…. 너무 고마워!” (20통 거주 박아무개 할머니)
지난 12일 오후 광진구 자양4동주민센터 앞. ‘어르신 색칠 그림 전시회’라는 펼침막 옆에 거북과 부엉이 등을 그린 그림 8점이 전시 중이다. 그림마다 어르신과 짝을 이룬 복지플래너가 적은 사연이 붙어 있다. 한중식 주민복지1팀장은 “지나가는 주민들이 보고 그림을 구경하다 어르신들이 그리셨다고 하면 많이들 놀란다. 그림 밑에 적힌 사연을 보면서 찡하다는 주민도 있었다”고 말했다.
지난 3월부터 자양4동주민센터가 시작한 홀몸 어르신을 위한 은둔 탈출 프로그램 ‘복지플래너와 함께 그리는 나의 하루’에서 완성한 그림들이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내성적인 성격으로 야외 활동이 어려운 어르신의 집으로 복지플래너가 찾아가 함께 그림 그리기 활동을 한다. 외부 강의 형태가 아니라 집으로 찾아가는 방문형 어르신 미술 활동은 서울 자치구 가운데 처음이다. 미리 그려져 있는 밑그림에 지정된 색깔의 물감으로 색칠하는 ‘색칠 그림책’(컬러링 북)을 이용했기 때문에 외부 강사 도움 없이도 복지플래너가 지도할 수 있다.
이 사업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발령받은 지 만 2년도 안 된 새내기 복지플래너 김남영(29) 주무관이다. “어르신 댁에 방문할 때마다 ‘오늘 하루 뭐하셨어요?’ 물어보면 경로당이나 복지관에 안 가고 집에만 계시면서 ‘티브이만 보고 있었다’ ‘매일 똑같지 뭐’ 이렇게 말씀하는 분이 많더라고요. 외출하는 게 힘든 분들께 집에서 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만들어드리고 싶었는데, 어르신도 복지플래너도 하기 쉬운 걸 생각하다가 색칠 그림책을 떠올렸어요.” 색칠 그림책은 밑그림 부분마다 번호가 적혀 있고, 그 숫자에 해당하는 물감으로 색을 채워넣으면 혼자서도 쉽게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이미 미술 심리 치료에 활용하는 복지관과 요양원도 있다. 게다가 캔버스와 12색 고형물감 1조가 1만원으로 저렴했다. “공무원이 된 뒤 처음으로 사업 아이디어를 올 초에 냈는데 의외로 팀장님과 동장님께서 좋게 보시고 적극 밀어주셨어요. 걱정했던 재원 부분도 자양4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위원장 이금영)에서 후원해주셔서 빨리 진행될 수 있었어요.” 한 팀장은 “공무원 생활 30년 했지만 2년 차 새내기 공무원이 단순하지만 꼭 필요한 부분을 짚은 사업을 제안해 깜짝 놀랐다. 현재 복지플래너가 어르신들과 소통하는 도구나 매개가 많지 않아 일상적인 안부만 묻고 있는데, 복합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사업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올해는 시범 사업으로 3개월마다 홀몸어르신 8명을 선정해 복지플래너가 매주 찾아가 그림 그리기를 지도한 뒤 완성한 그림으로 작은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3월부터 시작한 1기를 위해서는 비교적 간단한 그림을 골랐다. 그러나 김 주무관은 “우리가 어르신을 잘 몰랐나봐요”라며 금세 후회했다. “어르신마다 속도 차가 엄청났어요. 밑그림 선이 너무 연해 안 보인다는 어르신들이 많아 복지플래너들이 밑그림을 따드린 뒤 ‘다음주까지 여기 색칠해놓으세요’ 하는데, 그림을 빨리 완성하고 싶은 분은 매주 먼저 전화하셔서 ‘이번 주에는 언제 올 거냐’ ‘그림 벌써 꺼내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빨리 오라고 재촉하셨어요. 그림 하나를 3주 만에 완성하시는 바람에 하나 더 그리신 분도 계세요. 어떤 할머니는 창의적으로 배경을 그러데이션(색조 변화)해놓으셨더라고요. ‘그냥 단색이면 밋밋할 것 같고, 예쁠 것 같아서 이렇게 칠했다’라고 하셔서 놀랐어요.” 어르신들이 집에만 있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고령에 몸이 불편해서 외출이 힘든 것이지만, 단절된 가족관계와 어려운 경제 사정도 얽혀 있었다. “전에는 일상적인 안부만 확인했는데, 그림을 함께 그리면서 젊었을 때 고생한 이야기부터 자신을 돌보지 않는 자식들에 대한 섭섭함까지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통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직접 말씀은 안 하셔도 경제 문제로 복지관이나 경로당 등에 안 가시는 것일 수도 있어요. 거기에 가면 빈부 격차가 느껴지니까요. 그런데 그림 그리는 동안은 근심이나 걱정이 없어졌고, 그리기에 집중하니까 밤에 잠도 잘 온다고 하셨어요.” 동주민센터 앞에 전시된 자신의 그림을 본 어르신들은 “내가 그린 그림이 맞냐”며 뿌듯해했다. 그림을 그릴 때 손이 떨려 그림을 가장 늦게 완성한 89살 할머니도 2기에 계속 참여하길 원한다. “집에 혼자 있으면 우울할 때가 있는데 제가 매주 오는 게 정말 좋았다고 하세요. 계속 함께 그림을 그리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싶으시대요.” 자양4동은 반지하가 많은 오래된 주택가라 노인과 영세민이 유달리 많다. 현재 9명의 복지플래너가 각각 70가구씩 담당할 정도로 업무 부담도 큰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르신 한 분을 위해 매주 1시간을 할애하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김 주무관은 “내년에는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과 어르신을 1 대 1로 연결하는 식으로 사업을 확대해 장기적으로 지역 안에서 주민 스스로 돌보는 돌봄 공동체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지난 12일 오후 광진구 자양4동주민센터 앞에서 은둔형 어르신을 위한 방문형 미술 활동을 기획한 김남영 주무관이 전시된 ‘어르신 색칠 그림’의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이 사업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발령받은 지 만 2년도 안 된 새내기 복지플래너 김남영(29) 주무관이다. “어르신 댁에 방문할 때마다 ‘오늘 하루 뭐하셨어요?’ 물어보면 경로당이나 복지관에 안 가고 집에만 계시면서 ‘티브이만 보고 있었다’ ‘매일 똑같지 뭐’ 이렇게 말씀하는 분이 많더라고요. 외출하는 게 힘든 분들께 집에서 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만들어드리고 싶었는데, 어르신도 복지플래너도 하기 쉬운 걸 생각하다가 색칠 그림책을 떠올렸어요.” 색칠 그림책은 밑그림 부분마다 번호가 적혀 있고, 그 숫자에 해당하는 물감으로 색을 채워넣으면 혼자서도 쉽게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이미 미술 심리 치료에 활용하는 복지관과 요양원도 있다. 게다가 캔버스와 12색 고형물감 1조가 1만원으로 저렴했다. “공무원이 된 뒤 처음으로 사업 아이디어를 올 초에 냈는데 의외로 팀장님과 동장님께서 좋게 보시고 적극 밀어주셨어요. 걱정했던 재원 부분도 자양4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위원장 이금영)에서 후원해주셔서 빨리 진행될 수 있었어요.” 한 팀장은 “공무원 생활 30년 했지만 2년 차 새내기 공무원이 단순하지만 꼭 필요한 부분을 짚은 사업을 제안해 깜짝 놀랐다. 현재 복지플래너가 어르신들과 소통하는 도구나 매개가 많지 않아 일상적인 안부만 묻고 있는데, 복합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사업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올해는 시범 사업으로 3개월마다 홀몸어르신 8명을 선정해 복지플래너가 매주 찾아가 그림 그리기를 지도한 뒤 완성한 그림으로 작은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3월부터 시작한 1기를 위해서는 비교적 간단한 그림을 골랐다. 그러나 김 주무관은 “우리가 어르신을 잘 몰랐나봐요”라며 금세 후회했다. “어르신마다 속도 차가 엄청났어요. 밑그림 선이 너무 연해 안 보인다는 어르신들이 많아 복지플래너들이 밑그림을 따드린 뒤 ‘다음주까지 여기 색칠해놓으세요’ 하는데, 그림을 빨리 완성하고 싶은 분은 매주 먼저 전화하셔서 ‘이번 주에는 언제 올 거냐’ ‘그림 벌써 꺼내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빨리 오라고 재촉하셨어요. 그림 하나를 3주 만에 완성하시는 바람에 하나 더 그리신 분도 계세요. 어떤 할머니는 창의적으로 배경을 그러데이션(색조 변화)해놓으셨더라고요. ‘그냥 단색이면 밋밋할 것 같고, 예쁠 것 같아서 이렇게 칠했다’라고 하셔서 놀랐어요.” 어르신들이 집에만 있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고령에 몸이 불편해서 외출이 힘든 것이지만, 단절된 가족관계와 어려운 경제 사정도 얽혀 있었다. “전에는 일상적인 안부만 확인했는데, 그림을 함께 그리면서 젊었을 때 고생한 이야기부터 자신을 돌보지 않는 자식들에 대한 섭섭함까지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통의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직접 말씀은 안 하셔도 경제 문제로 복지관이나 경로당 등에 안 가시는 것일 수도 있어요. 거기에 가면 빈부 격차가 느껴지니까요. 그런데 그림 그리는 동안은 근심이나 걱정이 없어졌고, 그리기에 집중하니까 밤에 잠도 잘 온다고 하셨어요.” 동주민센터 앞에 전시된 자신의 그림을 본 어르신들은 “내가 그린 그림이 맞냐”며 뿌듯해했다. 그림을 그릴 때 손이 떨려 그림을 가장 늦게 완성한 89살 할머니도 2기에 계속 참여하길 원한다. “집에 혼자 있으면 우울할 때가 있는데 제가 매주 오는 게 정말 좋았다고 하세요. 계속 함께 그림을 그리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싶으시대요.” 자양4동은 반지하가 많은 오래된 주택가라 노인과 영세민이 유달리 많다. 현재 9명의 복지플래너가 각각 70가구씩 담당할 정도로 업무 부담도 큰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르신 한 분을 위해 매주 1시간을 할애하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김 주무관은 “내년에는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과 어르신을 1 대 1로 연결하는 식으로 사업을 확대해 장기적으로 지역 안에서 주민 스스로 돌보는 돌봄 공동체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