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노예 생활”…그 말은 사실이었다

권은중의 나이 쉰에 떠난 이탈리아 요리 유학기⑧ 요리학교 졸업, 레스토랑 인턴 생활 시작

등록 : 2019-06-27 16:02 수정 : 2019-06-28 15:57
전쟁 같은 주방일 처음인데다

매일 셰프의 불호령 감당 힘들어

학교 졸업 뒤 1주 휴가 흔쾌히

허락한 셰프가 호랑이일 줄이야

오전 9시~밤 12시 강행군에다가

“불 피하지 마라”는 셰프의 엄명

내 손목 잡고 “이렇게 하란 말이야”

날마다 정어리 다듬다 다리에 쥐


셰프는 새 메뉴 연구로 마지막 퇴근

토리노는 노천카페의 천국이다. 도로를 카페가 점령했다. 차들은 카페 사이로 겨우 지나다닌다.

“여러분은 지금은 학생이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레스토랑에서 인턴을 하는 순간부터 노예다.”

졸업을 코앞에 둔 5월 말,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서 와인을 가르친 에치오가 웃으면서 한 말이 당시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40대 후반인 그는 괴팍한 천재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기에 그저 우리를 웃기려고 하는 말이려니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지난 4일부터 시작한 인턴 생활은 자는 시간을 빼고는 대부분 일해야 했다. 아침 9시에 시작한 일은 밤 11시나 12시에 끝났고, 토요일에는 새벽 1시가 돼서 일을 마쳤다(물론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휴식 시간이 있다). 일을 시작한 첫 주에는 아예 일하다가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가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루에 4kg 반죽으로 제빵을 하는 일이었다. 한 시간이면 할 일을 반나절이 걸린다고 야단을 맞았다.

몸속 수분마저 갈 곳을 잃었던 까닭은, 전쟁 같은 주방일이 처음이기도 했지만 매일같이 셰프에게 불호령을 들었던 탓이다. 셰프는 나에게 이탈리아어로 명령했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올해 1월 초부터다. 거기다 나는 레스토랑 주방에 서본 적 없는 아마추어다. 즉 손이 느리고 많은 양의 요리를 빠르고 정확하게 만드는 데 서툴다는 이야기다. 셰프가 나에게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지난 20일 저녁 50명의 단체 손님이 왔다. 빈 흰 접시는 인턴인 나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나의 셰프 프랑코는 학교에서 친절하고 인자한 성품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내가 인턴 생활을 그의 레스토랑인 토리노 근교의 ‘라 베툴라’(La Betulla·자작나무란 뜻)에서 시작한 것도 그의 인자한 성품 때문이었다. 내가 그에게 졸업 후 일주일 정도만 쉬면서 재충전할 수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도 그는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나이 쉰에 3개월 학교생활에 지쳐 재충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셰프가 그렇게 휴가를 허락할 줄은 몰랐다.

휴가가 생기면 그동안 꼭 가고 싶었던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와 제노바의 바다를 보겠다고 다짐했지만, 일주일 내내 토리노의 숙소에서 잠만 잤다. 하지만 소득도 있었다. 몇 달 동안 찾아헤맸던 인스턴트 냉면을 토리노의 아시안 마켓에서 찾았다. 그토록 먹고 싶었던 물냉면을 만들어 먹으며 향수병을 달랬다. 그리고 학교가 있던 시골 동네인 아스티에서 구할 수 없던 시칠리아, 풀리아 같은 이탈리아 남부 포도주를 사서 마셨다. 매일 밤 혼술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토리노에서 보낸 일주일의 휴가 기간 동안의 최대의 수확은 평양냉면과 김이다. 이 냉면으로 향수병을 달랬다

토리노에서 또 하나의 즐거웠던 경험은 노천카페였다. 토리노 중심가의 노천카페는 아예 길을 막다시피 좌석을 만들어놓고 영업한다. 차는 카페와 카페 사이를 겨우 빠져나간다. 너무 근사한 카페가 많아 어딜 가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1910년대 생긴 유서 깊은 카페나 바도 많았다. 가격도 5~8유로(6천~1만원 정도)면 스파클링 와인을 안주와 함께 즐길 수 있었다.

토리노에는 1900년대 초에 생긴 유서깊은 카페가 많다. 카페 물란자노도 그 중의 하나다.

토리노 중심가에 있는 이 카페에서 7~8유로면 와인에 안주까지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일주일간 재충전한 체력은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 이어지는 레스토랑의 강도 높은 노동으로 사흘도 안 돼 바닥났다. 1주차 토요일이던 6월8일 나도 불 앞에 서야 했다. 셰프는 주로 튀기는 일을 나에게 시켰는데, 호통이 이어졌다. 셰프는 “불을 피하지 마라. 기름이 튀어도 서 있어라. 프라이팬은 한손으로 드는 것이고, 주부처럼 주걱은 쓰지 마라”며 빨간 모자 쓴 군대 조교처럼 나를 몰아세웠다.

나와 셰프는 화구 6개인 가스레인지를 같이 써야 했기에 우리는 나란히 서서 일했다. 셰프는 100㎏이 넘는 거구다. 그런 사람이 바로 옆에서 사천왕처럼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지르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가끔 셰프는 내 손목을 움켜쥐고서는 “이렇게 팬을 흔들란 말이다!”라고 이탈리아어로 소리쳤다. 어찌나 야단을 맞았는지 그날 밤은 옷도 벗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넋이 빠져 혼절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다음주에는 더 혹독한 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4시부터 6시까지의 금쪽같은 오후 휴식도 1시간으로 반토막 났다. 매일 밤 자정이 넘어야 일이 끝났다. 셰프의 불호령 역시 계속됐다. 친절한 프랑코는 학교에서나 만날 수 있지, 주방에서는 만날 수가 없었다. 그 주 주말은 레스토랑의 특별 미식 주간으로, 생선 요리를 새로 선보였고 이를 준비했던 것이다. 매일매일 수백 마리 정어리와 전갱이의 대가리를 자르고 내장을 정리해야 했다. 서서 일하는 시간이 길다보니 2주차부터 계속해서 다리에 쥐가 났다. 대입을 앞둔 고3 이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쏨뱅이를 손질해 잘게 잘라 토막을 내 센 불에 볶았다. 해체는 다른 스태프가 했지만 생선의 가시를 일일이 족집게로 뽑은 뒤 자르고 볶는 건 내가 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단체채팅방에 올라온 한국인 동기들의 사연을 보니 나보다 더 열악한 경우가 많았다. 이탈리아 전역으로 흩어진 동기들의 근무시간은 자정이나 1시는 기본이고, 심지어 오후에 정식 휴식 시간을 주지 않은 레스토랑도 있었다. 게다가 나처럼 월·화 이틀을 쉬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무급 인턴이기 때문에 레스토랑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우리를 더 쓰는 게 이익이었다. 노동강도만 놓고 보면 오히려 나는 셰프에게 감사해야 했다.

거기다 프랑코 셰프는 배울 점이 많았다. 셰프는 맨 마지막에 퇴근했다. 날마다 책과 컴퓨터를 보며 새로운 메뉴를 연구하고 있었다. ‘라 베툴라’는 한 달에 한 번씩 메인 메뉴를 바꾼다. 메인 메뉴와 별도로 한 달에 2~3번씩 새로운 주제의 메뉴로 이루어진 미식 주간을 준비한다. ‘여름 냉면, 겨울 곰탕’같이 습관적인 메뉴 변경이 아니라 완전히 메뉴를 바꾼다. 메뉴를 이렇게 자주 바꾸는 것은 많은 경험이나 정성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인턴을 온 지 2주 만에 메뉴가 5번 이상 바뀌었다. 셰프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토끼 32마리의 가슴살을 잘라 두들겨 넓게 편 다음 삶은 감자를 넣고 랩에 싸서 냉장한다. 하루 뒤에 이걸 튀긴 뒤 토마토 소스에 얹어 먹는다. 이걸 만들다 이탈리아에 유학 온 뒤 처음으로 화상을 입었다.

셰프가 고심해 만든 메뉴를 보면 ‘샤르데나’나 ‘알렉산드리아’ 같은 이탈리아 방방곡곡의 지명이 등장한다. 물고기 이름도 그 지역 방언을 그대로 쓴다. 한국에서 ‘삼숙이’(삼세기의 강원도 사투리)탕, ‘간재미’(가오리의 충청도 사투리)회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탈리아어도 잘 못하는 내가 방언부터 익히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지만, 사전을 찾아가며 이탈리아 사투리로 물고기 이름을 익히는 재미도 적잖다.

육고기를 유독 사랑하는 피에몬테 지역에서 이탈리아 해산물 방언까지 알고 있는 셰프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탈리아 해산물 요리를 배우고 싶었지만 인턴을 할 만한 레스토랑을 찾지 못했다. 2주차가 끝날 무렵 생각이 이렇게 바뀌자 강도 높은 노동은 참을 만해졌고, 셰프가 소리를 질러도 실실 웃으면서 눈치를 살피는 여유를 찾게 됐다. 물론 셰프는 “왜 웃어?”라고 또 호통을 치지만 말이다.

글·사진 권은중 <독학 파스타>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