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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지도를 따라가보니 새길을 만났다

김훈·박래부 <문학기행>, 김윤식의 <환각을 찾아서>, 김정동의 <문학 속 우리 도시 기행> 등 문학과 기행의 만남

등록 : 2019-06-27 16:20
기행문학은 점점 보편화되지만

문학기행은 저자 범위도 넓지 않아

그들의 종점을 출발점 삼아

나의 서울문학기행을 세워보자

서울 문학기행 윤동주 편-서촌 골목길과 인왕산 숲길을 지나 ‘시인의 언덕’에 도착한 시민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서울 문학기행 서정주편- 시인의 집 ‘봉산산방’에서 육필 원고와 낙관 등을 볼 수 있다.

낯선 이와 벽을 허무는 데 ‘여행’은 요긴한 대화 소재다. 사람들 대부분은 어딘가 막 다녀왔고, 조만간 떠날 예정이거나, 언젠간 떠나고 싶어 한다. 그 때문에 요즘은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이들의 장단을 곧잘 맞추는 요령도 필요하다.

마티아스 드뷔로는 “오디세우스처럼 근사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을 상대하기란 보통 성가신 일이 아니다”라며 <여행 이야기로 주위 사람들을 짜증 나게 만드는 기술>에 썼다. 그만큼 여행이 쉬워진 시대라고 풀이하면, ‘나야말로 진정한 유목민이었어!’ 식의 수다를 풀어놓은 적 있는 경험자들은 가슴이 덜 따끔거릴 수 있겠다.


여행을 떠났다가 이야기를 꾸려오는 기행문학은 세대가 바뀔수록 보편적이건만, 단어만 조금 바꾼 ‘… 문학기행’을 책 제목으로 붙이는 일이 쉽지 않다. 저자 범위도 좁다. 1986년부터 2004년까지 일간지에 연재한 문학기행을 모아 <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을 냈던 두 글쓴이는 “이거 순 골 빠개지는 일”이었음을 토로했다. ‘앉은뱅이 무릎걸음으로 겨우겨우 기어’나가듯 걷고 여행과 고행 사이에서 한국의 진 땅과 마른 땅을 밟아가는 길. 두 기자에게 ‘문학기행’이란 ‘맨살로 맨발로’ 한국문학 배경을 판에 짜는 ‘문학 지도’와 마찬가지였다.

메르카토르가 고안한 도법이 지구를 투영하는 기준이 된 것처럼, 한국 문학기행의 기준으로 두 기자의 도법이 여전히 오르내린다. 고약한 불평 속에서만 어찌할 바 없이 드러나는 글쟁이들의 ‘신명’ 덕 같다. 고 김윤식 문학평론가는 “지난날에 읽었던 훌륭한 작품은 그 자체가 우리 인생의 절정기와 같아서, 다시 그것을 회상하는 일은 일종의 정복(淨福·맑고도 조촐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고 추천사를 썼다.

김윤식 평론가의 ‘문학기행’은 땅울림과 흡사한 ‘제4의 목소리’를 찾아 듣는 일과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는 문학기행 산문집 <환각을 찾아서>(1992년 세계사)에서 “제4의 목소리란 내가 찾아낸 것이며 따라서 내 몫인 까닭입니다. 남이 창작해놓은 작품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고안해낸 장치가 내게 있어 문학기행이기에 이는 나만의 영역이며 따라서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첫 줄을 시작한 <김윤식 문학기행-머나먼 울림, 선연한 헛것>(2001년 문학사상사)에서도 울림, 환각, 헛것을 좇는 저자의 여정이 이어진다. 그는 몽골 초원에서 ‘별떨기’ 사이로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등불 같은 여객기를 보고 “아, 울란바토르!” 하며 떨리는 소리를 내었다.

‘공간 분석’에 무게를 둔 <문학 속 우리 도시 기행 1, 2>(2005년 푸른역사)를 쓴 김정동 목원대 건축도시공학부 명예교수는 ‘도시’라는 근대 산물에 초점을 맞췄다. 근대 건축사를 정리하다가 무분별한 도시개발로 사라져버린 건물들을 근현대 소설에서 찾아냈던 것이 문학기행에 나선 계기였다. “역사적인 건축물과 거리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볼 수 없는 나에게 이만큼 현실적인 단서가 되는 자료도 없었다”는 고백이다. 그는 서울 속 문학 배경과 공간들을 더 명소화해야 한다며, 건축사가로서의 할 일을 적고 후학에 맡겼다. “무엇보다 서울 속 시간이 멈춘 공간에 청년들이 더 왔다 갔다 하고 자주 걸어다니길 바랍니다. 옛길을 딛고 새길을 만들어가야 하니까요.”

시간과 국경을 넘은 문학기행을 탐독하다보면 그 모든 여행의 종점이 결국 ‘책상’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모두가 종이에 온점을 찍을 때 주어진 모든 여정을 마쳤다. 그들의 종점을 내 출발점으로 삼아 제 목소리를 찾아가는 일이 문학기행이라면, 서울 문학기행은 여행자라면 생애 한번쯤 도전해볼 만한 과업이 아닐까.

<서울 문학 기행>(2017년 아르테)을 쓴 방민호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는 “서울 곳곳엔 한국 사람의 기쁨과 슬픔, 고통과 아름다움, 인내 등이 문학의 흔적으로 스며 있다. 이 사연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새롭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2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봉산산방 뒷마당에서 만난 박경철 문학평론가는 “시인을 만든 건 팔할이 바람. 1천여 편 시 중 560여 편이 여행에 관한 시. 어딘가 안주하는 걸 싫어했던 고인은 여행에서 돌아와 시를 낼 때마다 세계가 바뀌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문학과 기행’의 관계를 묻는 말에 2000년 겨울 봉산산방에서 만난 고인의 말을 요약했다. 다시 먼 곳으로 떠날 채비하는 시인의 마지막 말이다. “시인이란 똑같은 소리 되풀이하지 말고 계속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야 되는 것이야. 기웃기웃거리며 남의 것 좋다 흉내 내지 말고 무엇에도 흔들림 없는 ‘절대적 자아’를 가지고 끝없이 떠돌라는 것이지. 아직 덜 되어서 무엇인가 더 되려고 떠도는 것이 시이고 우리네 삶 아닌가.”

글·사진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