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사회 부조리에 눈뜬 홍길동의 활동 무대

유영호의 우리 동네 어슬렁 산책, 요즘 뜨는 동네 익선동 주변

등록 : 2019-07-18 14:56
허균 소설 속 홍길동이 성장하며

신분제 사회 문제점 파악한 곳

피카디리극장 터에 있던 명월관

‘기생 같지 않았던 기생들’ 유명

을사오적의 첩 제안 단호히 거절

경무총감 돈봉투 제안도 뿌리쳐

‘북촌 한옥마을’이라고 알려진 종로구 가회동 한옥마을을 필두로 도시 골목길 여행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해 경복궁 서쪽의 옥인동 일대도 큰 도시 관광지로 변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종로3가에 있는 종로구 익선동 한옥마을로 이어진다. 하지만 익선동 166번지 일대만 과거를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이야기 속에서 과거를 상상해야만 한다. 먼저 종로3가에서 율곡로까지는 금위영천 물길을 따라 오르며, 내려올 때는 북영천 물길을 따라 걸어보도록 하자.


현재 ‘CGV피카디리1958’ 극장 터는 옛 ‘명월관’ 자리였다. 명월관은 조선 시대 궁중 요리를 담당하던 안순환이 1904년 광화문네거리 현 일민미술관 자리에서 시작했으나, 1918년 불이 나면서 이곳에 들어섰다. 명월관 기생은 일반적인 기생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진주 기생 산홍은 1906년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지용이 첩이 되어달라 하자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자유롭게 사는 사람인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며 거절했다고 <매천야록>은 전한다.

이뿐이 아니다. 기생 춘외춘은 경무총감부에 불려가, 경무총감이 배일파 정보를 알려달라며 건네주는 돈뭉치를 뿌리쳤다. 기생 주옥경은 손병희 선생의 옥바라지를 했다. 이에 1967년 정부에서 손병희에게 수여한 건국공로훈장을 주옥경이 대신 받았다. 또 기생 현산옥은 일본 육군대장을 저격하고 도주하던 의열단 오성륜을 숨겨주었다. 이 이야기들이 마치 영화 속 이야기 같지만 역사가 엄연히 증언하고 있다.

피카디리 뒤편 돈의동에는 신자유주의 시대 빈익빈 부익부의 그늘 쪽방촌이 있다. 이곳을 지나 종로3가에서 요즘 말로 제일 ‘핫한’ 익선동 한옥마을로 향한다. 이곳 익선동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의 건양사가 가회동 한옥마을에 앞서 1920년대 개발한 곳이다. 당시 왕족의 종친 이해승의 땅을 사들여 필지를 분할한 뒤 주택을 지은 것이 지금의 익선동 한옥마을(익선동 166)이다.

정세권은 인근의 익선동 33번지에서도 고종의 서자 완화궁의 사택도 사들여 똑같이 한옥마을로 개발했지만 이곳은 한옥이 많이 사라졌다. 현재는 166번지만 온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불과 2~3년 전까지 주거용으로 남아 있던 것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대부분 외형만 기와지붕을 한 채 상점으로 바뀌고 있다.

대부분 상업공간으로 변해버린 익선동 한옥마을.

한옥마을 북쪽에는 70년대 3대 요정의 하나로 요정 정치의 주무대였던 ‘오진암’(梧珍庵)이 있었다. 이곳은 2010년 철거되고 관광호텔이 들어섰다. 오진암은 조선 말기 유명 화가이자 문화재 수집가로 알려진 이병직이 살던 곳으로, 그가 소장했던 <삼국유사>가 우리에게 전해진다. 이곳이 1953년부터 ‘안마당에 멋진 오동나무가 있다’ 하여 ‘오진암’이라는 이름의 요정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1972년 몰래 방남한 북한의 박성철 부수상이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7·4공동성명을 논의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는 이곳에 호텔(‘이비스 앰배서더 서울 인사동’)이 들어섰지만 다행히 오진암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종로구 부암동에서 ‘무계원’이란 이름의 전통문화공간으로 되살아났다.

한편, 오진암 인근에는 홍명희가 살던 주택(익선동 33-6)이 있었다. 지금은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전혀 과거를 상상할 수 없지만, 바로 이곳에서 그는 불후의 명작 <임꺽정>을 집필했다.

이제 금위영천 물길에서 북영천으로 옮겨 다시 종로3가 쪽으로 내려가자. 창덕궁 단봉문 쪽으로 흘러내려오는 이 물길이 처음 만나는 곳은 종로구 권농동이다. 바로 이곳이 소설 속에서 홍길동이 성장하며, 궁궐 앞에서 양반 사회의 부조리를 파악했던 곳이다.

구불구불 복개도로를 따라 걸어가면 국내 최초의 영화관이었던 ‘단성사’(현 단성골드빌딩)가 최근까지 있던 곳이 나온다. 이곳에서 1919년 최초의 한국인 영화 <의리적 구토>가 개봉됐다. 개봉날인 10월27일은 현재 ‘영화의 날’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나운규의 <아리랑>(1926년)과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춘향전>(1935년) <역도산>(1965년) <겨울 여자>(1977년)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년) 등 당대 최고의 영화가 이곳을 거쳤다.

북영천길을 따라 더 내려오면 창덕궁 옆 봉익동을 만난다. 창덕궁과 관련해 왕을 뜻하는 봉황의 의미를 지명에 넣은 곳이다. 이곳은 전쟁 후 일명 ‘종삼’ 사창가로 변했던 곳이다. 1970년대 서울 도시계획 주역이었던 고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당시 이곳 종묘 앞을 중심으로 낙원상가부터 종로5가까지 사창가였으며, “세계 매춘의 역사에서 이렇게 크고 번창한 예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는 전쟁의 후과로 “남자 하나에 여자 한 트럭”이었으며,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아야 했던 슬픈 역사의 시기가 있었다. 고은 시인은 “1950년대의 폐허에서 명동의 술과 종삼의 여자만이 1950년대 작가의 진정한 고향”이었으며, “기성 작가·신인·문학 지망생을 통틀어 그곳에 가지 않는 자는 없다”고 고백했다. 얼마나 많이 남자들이 이곳을 찾았는지, 이른바 ‘종삼 동서들’이란 유행어가 생겼을 정도다.

그러던 중 1968년 9월26일 마침 세운상가 건설 현장을 시찰하던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에게 다가선 윤락녀로 인해 김현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그리고 바로 그날부터 “꽃을 찾는 나비를 잡아야” 매춘이 근절될 수 있다며, 소위 대대적인 ‘나비 작전’을 펼쳐 종삼 사창가를 완전히 쫓아냈다. 하지만 매춘은 도심을 떠났을 뿐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고,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