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죽은 이에게 띄우는 사랑의 노래죠, 이 묘비명은 모두”
현충일 앞두고 국립묘지 묘비 채록해 책으로 펴낸 조재구씨
등록 : 2016-06-03 10:17 수정 : 2016-06-03 12:59
30년 넘게 서울과 대전의 국립묘지를 찾아다니며 묘비명을 채록해 온 조재구씨가 동작동 현충원 사병 묘역의 한 무덤 앞에서 가족들이 남긴 추모글을 살펴보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조씨가 1985년부터 8년 동안 채록한 묘비명은 약 860여 편, 그 가운데 160여 편을 추려 <뜨거운 노래를 땅에 묻는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은 것이 1992년이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책이 많이 팔려 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세속적인 생각은 지워지고 그의 가슴에도 사랑을 잃은 사람의 정한이 한켜 두켜 쌓여갔다. “만날 때까지-어머니로부터” 오로지 이 한 마디만을 돌에 새긴 한 어머니의 깊고 깊은 슬픔의 심연을 어떻게 짐작이라도 하겠는가.(1969년 순직 육군상사 백우빈의 묘) “아빠 보고파요 / 명섭, 연수, 광섭 / 여보 여보 당신의 민예요 / 당신의 영원한 아내로서 / 당신이 못다 한 일 / 다 하고서 당신 곁에 가렵니다.” 아버지를 빼앗긴 삼남매와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젊은 아내는 앞으로 살아갈 험난한 시간의 두려움 앞에서 죽음을 초월한 가족의 사랑과 책임을 함께 다짐한다.(1971년 월남 전사 육군 소령 김영정의 묘) 조씨는 20여년 만에 다시 책을 엮은 이유에 대해 ‘인연’을 말했다. “말없이 죽은 남편의 묘비를 닦고 또 닦는 젊은 아내와, 외마디 비명 같은 그리움을 토해내는 어머니의 통한이 내 기억 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이 일이 점점 더 내 일생의 사업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여년의 세월 동안 세상은 평화만 있지 않았다. 그새 또 많은 사람이 갈등의 희생양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만큼 묘비명들도 늘어났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이 묘비명의 사연과 의미를 다큐멘터리나 영화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사명감이 들었다. 내 인생 후반의 목표를 설정한 셈이다.” -어떤 영화가 될까? “특별히 남을 위해 살아 본 경험이 별로 없고, 성향도 비판적이란 소리를 듣지만, 국립묘지에 와 보면, 여기가 곧 우리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너무 영웅이 없다. 뜻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진정한 영웅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다.” -보훈처나 국방부와도 그런 계획을 의논해 봤나? “보훈처 관계자는 만난 적이 없다. 다만 책 수익금이 생기면 보훈처에 기부한다는 뜻을 책 말미에 밝혀 놓았다. 국방부나 국군방송 관계자들은 대부분 나한테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국가가 할 일을 대신해 줘서 고맙다고.”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묘비명을 꼽아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다음 두 편을 골랐다. 전쟁터에 불려나가 죽은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의 노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가 어느 이름 없는 산야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열사의 노래였다. 그리워라 내 아들아, 보고 싶은 내 아들아 / 자고 나면 만나려나 / 꿈을 꾸면 찾아올까 / 흘러간 강물처럼 어디로 가 버렸나 / 애달퍼라 보고파라 그 모습이 그립구나 / 강남 바람 불어오면 / 그 봉오리 다시 필까 / 잊으려 해도 못 잊겠네 / 상사에 내 자식아. -1990년 아빠 엄마가(1984년 순직 공군 소령 박명렬의 묘) 나의 무덤에 묘비가 쓸데없다/고향에 묻히어 한 줌 흙 되면 그뿐/이름 없는 꽃이나 한 그루 심어다오/나는 썩어 거름이 되리니/고향의 봄에 한 송이 더 많은 꽃이 되리라.(1964년 서거 애국지사 노성원의 묘) 조씨는 씨제이미디어 부사장 출신으로 중화티브이 사장, 씨제이헬로비전 대표를 지냈다. 중국에서 미디어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은 중국통이다. 한중미디어연구소를 세워 한국과 중국 사이의 미디어 교류와 중국 관련 콘텐츠 제작 사업 등을 하고 있다. <서울&> 콘텐츠 디렉터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