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또한 추락한다.”
단색화 열풍을 이끌었던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인 박서보(88) 화백이 자신의 이름을 내건 회고전 ‘박서보’(~9월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벽면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대한민국 미술사에서 한 획을 긋고 있는 그가 구순을 앞두고 의미심장한 말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뭘까. 게다가 한 세기를 통과할 만큼 지칠 줄 모르는 변신의 비결도 궁금했다.
“권태를 모른 채 수행을 반복하는 작가”라고 말문을 연 그는 전시의 부제도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고 지었다. 아날로그 70년을 정리하는 이번 전시를 앞두고 “예술은 시대의 산물이기에 시대와 무관한 예술은 옳지 않다”며, 한국의 역사를 온몸으로 견뎌온 그의 작품을 보면 왜 시대의 아카이빙이라 이르는지 짐작할 것이다.
실제로 19살이 되던 해,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전쟁의 상흔을 오롯이 작품에 토해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앵포르멜’(예술가의 즉흥성과 격정을 온전히 쏟아낸 추상미술)이라는 ‘회화 No.1’이다. 또한 1969년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달 착륙 사건은 그의 작품 세계에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회화는 붓의 탄력으로 저항을 가져오지만 공중에 분사되는 무중력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스프레이를 사용했죠.”
이렇게 작품 기법이나 재료에 변화를 줌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수행자로 채찍질한 것이다. 그러나 작업 과정에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프레이를 뿌릴 때 코를 약솜으로 막고 마스크와 방독면까지 썼지만 콧속은 물감 입자로 가득 찼는데, 그런 3여 년의 고집스러운 작업은 폐 질환을 남겨줬다. 지금은 심근경색까지 앓고 있지만 한시도 붓을 놓을 수가 없다며, 이런 ‘수행의 반복’에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장고의 세월을 견뎌온 화백은 ‘스트레스 병동’과 다를 바 없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캔버스에 단순히 자기 작품을 그리는 것은 의미 없어요. 예술은 시대의 번민과 고통을 캔버스에 흡입해야죠.”
■ 박서보는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홍익대 회화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전시로는 유전질 시리즈를 발표한 <서울화랑>(1970), <도쿄 무라마쓰화랑>(1973), 베니스 비엔날레(1988) 참가, 국립현대미술관전(2001), 프랑스 생테티엔트미술관전(2006), 경기도미술관전(2007), 뉴욕 아라리오갤러리전(2008) 등이 있다.
이규승 서울문화재단 홍보팀장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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