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비인 정순왕후 눈물 흔적 곳곳에 새겨져 있어
유영호의 우리 동네 어슬렁 산책ㅣ창신동·숭인동 일대
등록 : 2019-08-29 14:44 수정 : 2019-08-29 14:50
단종과 유배 전 마지막 밤 보낸 청룡사
‘영영 이별한 다리’인 청계천 영도교
그 뒤 슬픔으로 세월 보낸 정업원구기
생계 위해 옷 물들이던 ‘자지동천’까지
‘비만 피하는 집’인 이수광의 비우당과
귀족과 일본인 관리만 출입했다던
친일파 박영효의 집 ‘귀족회관’ 대비
역사의 영원한 평가 새삼 느껴져
종로구 창신동은 한양도성의 내사산(4대문 안쪽의 4산,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 가운데 가장 낮은 낙산 기슭의 동네다. 낙산은 낙타의 등처럼 볼록하게 생겼다 하여 ‘낙타산’이라고도 했다. 또 지하철 6호선이 지나가는 길은 본래 청계천 지류인 ‘영미정동천’의 한 물길이었다. 이 길 동쪽으로는 종로구 숭인동이 있다. 조선 시대 이곳은 한성부 5부 가운데 동부의 숭신방과 인창방이 있던 곳인데, 각각 첫 글자를 조합해 ‘창신동’과 ‘숭인동’이란 동명을 만들었다.
이 일대는 덕수궁 석조전, 조선총독부 등을 건축하는 데 쓰인 화강석 채굴장이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해방 후에는 6·25전쟁을 겪으며 이곳 산기슭에 판잣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서민층이 밀집하였다. 그 후 동대문에 평화시장(1961)이 들어서고,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1970)으로 작업 공간과 판매 공간이 분리되면서 이곳은 의류 공급 기지가 되었다.
오늘의 출발지인 창신동 동편에 있는 ‘동묘앞역’(1·6호선)이다. 이 지역 또한 온통 이야깃거리다. 먼저 동묘는 ‘동관왕묘’의 약칭으로, 임진왜란 직후 중국 관우의 신령을 모시려고 세운 것이다. 또 6번 출구 바로 앞에 새로 지은 건물이 있는데, 1964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동대문실내스케이트장’이 있던 곳이다. 그 왼쪽은 비록 옛집은 사라졌지만, 유홍준 교수가 우리나라 서양화의 대표 선수로 꼽은 박수근이 1952년부터 1963년까지 살던 곳이다. 또 오른쪽에는 1965년에 지은 오래된 ‘동대문아파트’가 있다.
이제 동묘앞역에서 왼편으로 조금 옮겨서 창신동 중앙을 흐르는 옛 물길을 따라 걸어보자. 동묘앞역에서 창신동으로 가는 길에서 국내 최대의 문구시장과 매운 족발로 유명한 ‘창신시장’을 만난다. 그 옆은 아직도 먼 나라로 느껴지는 ‘네팔 골목’이 있다.
한편 시장 인근에는 민가협(민주화운동 가족협의회), 유가협(민족민주열사 유가족협의회) 등 민주화운동 속에서 만들어진 단체들의 사무실이 모여 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민주 인사의 부모님 등이 모여 만든 민가협의 ‘양심수 석방을 위한 목요집회’는 벌써 16년 동안 1236번이나 열리고 있다. 단 한 명의 양심수도 없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져 이제는 80대 노인이 된 ‘부모님’들의 집회가 더 이상 열리지 않기를 소망해본다.
또 인근에는 여전히 의문의 자살로 남아 있는 가수 김광석이 살던 집이 있다. 또 그의 집에서 100m쯤 동쪽으로 조선 후기 지은 ‘안양암’이란 절이 있어 2009년 상계동 청광사로 위폐가 옮겨지기 전까지 김광석의 제사가 해마다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영미정동천을 따라 걷다 다시 낙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면 좁은 도로가 심한 경사에 회오리치듯 굽이치는 ‘당고개’에 이른다. 이곳을 당고개라 하는 것은 조선 말 순조 때 점술가들이 모여 살았고, 근처에 도당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 일대는 급한 경사 속에 서민층 집들이 밀집된 곳으로 이곳에서는 ‘돌산마을’이라 이르고 있지만 뜻밖에도 영화 <건축학 개론>, 드라마 <시크릿 가든> <미생> 등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한편 이곳 이름이 돌산마을이 된 배경인 채석장 절개지뿐만 아니라 건너편 숭인동 절개지도 장관이다. 이 일대가 채석장이 된 것은 190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여러 석조 건물을 건축한 시기와 일치한다. 초기에는 시미즈쿠미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다가 1924년부터는 조선총독부에서 직영하였고, 해방된 뒤 1960년대 후반에 폐쇄되었다. 서울시는 최근 이곳 절개지를 공원과 야외음악당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발표하였다. 아직은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채석장 절개지를 배경으로 연주되는 음악이 참으로 장관일 것이란 상상을 해본다.
이제 낙산 정상을 지나 숭인동 쪽으로 걷다 보면, 우리에게 슬프고도 애절한 여인으로 널리 알려진 단종비 정순왕후의 흔적이 곳곳에 펼쳐진다. ‘청룡사’에는 정순왕후 송씨가 단종과 마지막 밤을 보내며 빗물처럼 눈물을 흘렸다는 ‘우화루’가 있다. 또 다음날 단종과 ‘영영 이별한 다리’라 하여 이름 붙여진 청계천의 ‘영도교’, 그 후 그가 머물렀던 정업원구기, 또 매일같이 올라가 영월로 유배 간 단종을 그렸다는 ‘동망봉’이 있다. 그리고 그의 생계를 위해 저고리 깃·댕기 등에 자줏빛 물을 들인 곳이라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 있다. 한편 이곳 자지동천에는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이 살았다는 ‘비우당’(겨우 비만 가릴 수 있는 집)을 만들어놓았다.
정순왕후의 흔적을 따라 걷다보면 이내 첫 출발지인 동묘앞역 쪽으로 오게 된다. 인근의 동묘 맞은편 숭인동 72번지는 친일파 박영효의 집 ‘상춘원’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귀족이나 일본인 관리만 출입했다 하여 ‘귀족회관’이라 했던 곳이다. 또 창신동 두산아파트는 1933년부터 1986년까지 동덕여고가 있던 곳이며, 이곳의 남쪽으로는 최근에 마련한 ‘백남준기념관’이 있다.
이 일대는 백남준이 살던 약 3천 평의 ‘큰 대문집’이 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에 딱 2대밖에 없던 캐딜락이 있었고, 어머니로부터 “돈은 물 쓰듯 쓰는 것”이라고 배울 정도로 부유한 집이었다.
지금은 서민층의 거주지로 상징되는 이곳이 예전에는 박영효, 백남준 등 조선 최고 부자들이 살던 곳이었다는 것에 많은 상상을 해보게 된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창신동 채석장 절개지, 일명 ‘돌산마을’로 알려진 이곳을 서울시는 야외음악당으로 꾸미고자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