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향 기자가 다니는 집

채식주의 식단 돋보이는 신세대 한식집

주옥

등록 : 2016-06-09 14:09 수정 : 2016-06-10 09:16
숯불새우
영화관이 남프랑스 아베롱 지역의 노을로 채워졌다. 노을은 서글펐다. 대지를 물들이는 붉은빛을 등지고 선 이는 요리사 미셸 브라. 그는 아베롱의 자연 앞에서 속마음을 고백했다. “주방을 떠난 ‘나’는 ‘나’일 수 있을까!” 은퇴를 결심한, 머리 희끗한 노장의 뭉클한 독백은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지난달 26일부터 5일간 열린 <서울국제음식영화제>의 상영작이었던 다큐멘터리 영화 <브라씨 부자의 맛있는 가업 잇기>는 프랑스의 요리사 미셸 브라가 아들 세바스티앙에게 식당을 물려주는 과정을 다뤘다. ‘<미셰린 가이드> 별점 3개 획득’, ‘프랑스 요리의 살아 있는 전설’ 등 미셸 브라를 따라다니는 화려한 명성은 이 영화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았다.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평생 몰두한 이의 소박한 퇴임식이었다.

그의 삶은 땅을 사랑한 소박한 농부와 단호한 혁명가의 시간이 교차한다. 지금도 손수 채소를 키우는 그는 푸아그라, 캐비아, 송로버섯 등을 최고로 쳤던 프랑스인들에게 단지 부재료였던 채소로도 최고의 맛을 낼 수 있음을 70년대에 보여 줬다. 그가 선보인 ‘채소 중심의 퀴진’은 당시로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평생 ‘셰프’라고 불린 적이 없다는 그는 한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 “인간성이 말살되어 가는 지금, 엄격하고 권위적인 분위기의 주방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직원들은 그를 그저 ‘미셸’이라 부른다. 영화에서 아들 세바스티앙은 끓인 우유에서 생기는 얇은 막을 튀겨 신메뉴를 만든다. 어릴 시절 할머니가 해 준 간식에서 영감을 받았다. 할머니는 우유를 끓여 막을 만들고, 그 막을 거둬 빵에 올리고는 그 위에 초콜릿을 얇게 갈아 올렸다.

몇 달 전 문을 연 서울 청담동의 레스토랑 ‘주옥’의 요리사 박세민(32)이 최근 “진주 외갓집에서 가져오는 두릅과, 매실, 죽순으로 만든 겁니다”라고 말을 건넸을 때 세바스티앙이 떠올랐다. ‘외갓집’은 자동으로 ‘할머니’를 떠오르게 하는 단어다. ‘외갓집할머니’는 우리 뇌리에 변경이 어려운 공식 같은 거다. 그의 한마디에 할머니의 간식에서 영감을 얻어 신메뉴를 개발한 세바스티앙을 떠올린 것은 무리한 비약일까! 주옥은 ‘치맥’에서 일했던 요리사 신창호(37), 박세민의 매니저 김주용(32)씨와 합심해 연 식당이다. 이제 문 연 지 고작 몇 달 남짓 되었다.

주옥의 ‘외갓집’은 요리사 신창호씨의 처가다. 망개잎, 제피잎, 산딸기 등이 자연과 호흡하면서 자란다. 주옥 요리사들의 텃밭이다. 간장소스에 조려 튀긴 닭고기요리나 한우 안심, 갈비찜 같은 고기류 요리도 있지만 차림표에 ‘글루텐 미포함’ ‘채식주의’ ‘채식주의(계란 우유 포함)’, ‘매운 재료가 포함된 음식’ 등을 음식마다 표시해 두어 채식 식단의 면모를 갖췄다. 앉자마자 나오는 7가지 식초 시음도 재미다.

주옥의 요리사들이 막걸리·사과·포도·귤·와인·생강·감으로 직접 담근 식초다. 제철 생선회와 돌미나리, 영양부추 등을 한 접시에 담아낸 ‘주옥 까르파치오’는 식감이 다른 식재료들의 자랑대회다. 주옥의 요리사들은 생선요리용 소스로 많이 쓰는 뱅블랑소스(생선육수나 크림, 백포도주와 샬롯, 버섯 등으로 만드는 소스)에 코코넛크림을 섞었다. 이 소스는 숯불에 적당히 익히 새우에 뿌린다. 전체적으로 ‘모던 한식’을 지향하는 식당보다 ‘한식’을 더 강조했다.

주옥의 요리사들은 부친의 품을 떠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세바스티앙과 닮은 구석이 있다. 이들이 그리는 맛의 세계를 지켜보고 싶다. (서울 청담동 18-3/4가지 점심 코스 2만5000원, 9000~4만8000원)


글·사진 박미향 <한겨레> 음식·요리 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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