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
의 B여사, <빈처>의 나, 현진건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시내버스 막차에서 본 피곤에 찌든 그 얼굴, 술 냄새 풍기며 조는 그 얼굴들이다. 소설 밖에서 소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이 시대의 또 다른 현진건은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현진건이 살던 집터를 찾아가는 길, 부암동 주민센터부터 반계 윤웅렬 별장까지 이어지는 300m 남짓의 길에 시대를 달리하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닭 키우고 글 쓰던 부암동 집터엔 잡초만 무성
부암동 주민센터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간다. 약 100m 정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에 무계원이 있다. 무계원은 2014년에 지은 한옥이다.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오진암(서울시 등록 음식점 1호)의 건물 자재 중 일부를 재활용해 지은 집이다. 무계원은 1910년에 지은 오진암 일부뿐 아니라 조선시대 시전행랑 일부도 살려낸 집이다.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뒤뜰 장독대 옆 석축 일부는 조선시대 시전행랑 등에서 출토된 돌로 쌓았다.
무계원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현진건 집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현진건은 1937년부터 이곳에서 살았다.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지만 집터에는 20여년 전만 해도 낡은 집 한 채가 남아 있었다. 1936년 현진건은 동아일보에서 일할 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위를 해서 월계관을 쓰고 단상에 오른 손기정의 사진에서 가슴에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을 발행했다. 이 일로 현진건은 1년 형을 선고 받았다. 출소한 현진건이 이사한 곳이 지금의 집이다.
현진건은 1920년대에는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등 소설을 발표했지만 그 이후로 창작활동이 뜸했다. 현진건은 1937년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생계를 위해 닭은 키우며 글을 썼다. 이때 쓴 작품이 장편 <무영탑>이었다. 이 작품은 1938년부터 1939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됐다. 백제 멸망 이후 백제의 부흥을 꿈꾸던 사람들의 이야기 <흑치상지>도 이 당시에 썼다.
현진건 집터 뒤에 ‘武溪洞’(무계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있다.(현진건 집터와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 터는 모두 개인의 소유이므로 출입할 수 없다. 멀리서 담장 너머 봐야 한다.) 현진건 집터 바로 위 철책 안 숲 커다란 바위 한쪽에 ‘靑溪洞天’(청계동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무계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 부근은 세종대왕의 아들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사가 있던 곳이다. 청계동천이란 말은 산천 계곡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무계원, 현진건 집터를 지나 그 위로 올라가는 포장도로는 예전에는 인왕산 북면에 있는 계곡이었다.
현진건은 이런 풍경과 이야기를 품고 살았다. 낮에는 닭을 치고 밤이면 불을 밝히고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작품을 썼을 것이다.
흔적도, 표석도 없는 제기동 집
청계동천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은 볼 수 없지만 반계 윤웅렬 별장 담장 아래에서 계곡의 흔적을 간신히 찾아볼 수 있다. 원래 계곡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물줄기가 계곡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현진건은 1943년 부암동을 떠나 제기동으로 집을 옮긴다. 고려대학교 정문 앞 건널목을 건너서 ‘고려마트24’ 옆 골목으로 들어간다. 처음 나오는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선다. 좁은 골목을 따라 걷는다. 이 골목 어디쯤에 현진건이 이 생에서 얻은 마지막 집이 있었다.
현진건의 제기동 집이 있었던 곳을 알리는 표지석은 없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주택가 오래된 골목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현진건의 흔적을 찾아 나선 길, 부암동 현진건 집터 도로변에서 본 표지석의 글귀가 떠오른다.
“근대문학 초기 단편소설의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소설가이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 소설과 민족적 현실 및 하층민에 대한 소설, 역사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진건이 살던 제기동 골목길에 시퍼런 저녁 공기가 퍼진다. 골목길을 나와 큰길에 있는 국숫집으로 들어갔다. <운수 좋은 날>에서 운수 좋게 돈을 많이 번 인력거꾼 김첨지가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친구 치삼이를 만나 추어탕에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이 생각났다.
‘오늘은 돈을 산더미처럼 벌었다’며 친구에게 술을 사는 김첨지, 그는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내고 집에서 앓고만 있는 아내가 그토록 원하던 설렁탕을 사 가지고 집에 도착하지만 김첨지 앞에 놓인 건 젖먹이 아이와 차갑게 굳은 아내의 시신이었다.
김첨지는 아내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린다. “이 눈깔! 이 눈깔! 왜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천장만 보느냐, 응.”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1988년 범우사에서 발행한 단편소설 모음집 <빈처> 중 ‘운수좋은 날’에서 인용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