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순의 도쿄라이프

일본인의 ‘배려’와 한국인의 ‘정’ 사이

등록 : 2016-06-09 14:55 수정 : 2016-06-10 11:45
일본의 극우단체들이 헤이트 스피치 대책법이 성립되기 전인 2013년 3월 도쿄의 한인타운인 신오쿠보에서 혐한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자료사진
지난 6월3일치 일본 <아사히신문>에 아주 기가 막힌 기사가 실렸다. 가와사키 시의 경찰청이 재일 한국인을 배척하고 혐오하는 거리시위를 반복하는, 이른바 ‘헤이트 스피치’ 데모 신청을 허가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공원에서 하는 것은 불허했고, 대신 도로교통법에 근거해서 도로 사용을 허가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소식을 들은 한국인들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반응 일색이다. 지난 5월24일 일본 국회에서 헤이트 스피치 대책법이 정식으로 성립해, 이제는 극우세력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겠구나 하고 안심했던 재일 한국인들은 또다시 일본 당국에 대해 실망했다. 우익 성향의 아베 정부가 들어선 뒤 재일 한국인을 향한 혐한 시위가 한동안 극성을 부렸다.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도쿄 신주쿠의 신오쿠보 거리, 오사카 이쿠노의 한인타운은 매주 극우 단체들이 몰려와 “조선인, 한국인은 일본을 떠나라” “한국인은 바퀴벌레” “한국인을 죽여야 한다” 등 극단적인 혐한 주장들을 외치는 바람에 생계형 영업은 제쳐두고 생명의 안위까지 걱정해야 했다.

그런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 한국 식당을 하거나 한국 상품을 파는 재일 한국인의 하루하루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일부 한국 가게 주인들은 아르바이트하는 한국 유학생들이 혐한 시위에 욱해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대와 충돌하지 않을까 쩔쩔매기도 했다. 혹시 일본 당국이 그들의 행동을 저지해 주지는 않을까, 야당이 헤이트 스피치 비판 발언을 좀 더 크게 외쳐 주면 안 될까 등등 지극히 소박한 기대를 하고 생명의 안위를 걱정해 가며 살던 때가 겨우 1년 전이다.

다행히 올바른 생각을 가진 일본인들이 대다수여서 그들의 광폭한 언행은 그다지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세계적인 지탄을 받았다. 지금은 타의에 의해 자제할 수밖에 없게 되어서 신주쿠 신오쿠보 한인거리도 점차 평온한 모습을 되찾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한국인의 마음, 정이다.

일본인들은 원리원칙을 고수하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는 틀에 너무 갇힌 나머지 언제부터인가 인간 본연의 ‘정’을 잃어버렸다. 마음을 나눠 주는 것도 반대로 마음을 받는 것에도 대단히 인색하다. 한국인들처럼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의사표시를 하면 좋으련만 일본인들은 감정의 표현마저도 억누를 수 있는 한 억누른다. 그리고 이를 상대방에 대한 ‘배려’ 또는 ‘예의’라고 칭한다.

이런 류의 감정 억제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만큼 사람을 피곤하고 메마르게 하는지 일본인 스스로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정서에 갈증을 느낀 일본인들이 자기 감정에 충실한 한국인들을 좋아하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 음악을 듣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일본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면 한결같이 한국 드라마에는 인간 군상들의 희로애락이 있어서 좋다고 한다. 일본 주간지에서도 몇 차례 비판한 바 있지만, 한국 드라마에는 어김없이 전지전능하신 재벌 아들과 가난한 여주인공, 그리고 출생의 비밀과 불치병이 등장해 뻔하게 보인다. 그런데도 한국 드라마에는 ‘사람 냄새’가 풍겨 재미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막장 드라마라고 손가락질하고 욕하면서 보듯이, 일본인들도 똑같이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비판하며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한국 드라마 속 한국인 냄새를 맡기 위해 일부러 신주쿠 한인타운에 갔다가 매상 액수에 따라 서비스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대단히 실망했다는 일본인들이 많다. 한인타운이 막 형성되던 초창기에는 음식의 양이나 값, 그리고 일본인 손님에 대해 인정이 넘쳤는데, 지금은 일본 손님 스스로가 자신을 돈으로밖에 보지 않는다는 자각이 들 만큼 ‘사람’은 없고 ‘장사돈’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이 한국 드라마, 한국 음악을 좋아하는 것은 일본인들이 애써 억누르고 있는 사람 냄새가 한국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극우세력의 혐한 시위에 대해서는 그리도 맹렬히 비판하면서, 정작 우리가 잃어버린 ‘인정’은 되찾을 생각을 안 하고 있다. 한국인 특유의 정이야말로 계산할 수 없는 무한대의 큰 자산인데 말이다.

글 유재순 일본 전문 온라인매체 <제이피뉴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