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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책 읽고, 소감 나누다 보니 어느새 10년

곰달래도서관 독서모임 ‘색연필’ ‘느슨한 공동 독서’ 장수 비결

등록 : 2016-06-09 15:22
함께 읽고 토론하는 책 한 권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이어 주는 다리 구실을 한다. 10년째 책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색연필’ 회원들이 화곡동 곰달래도서관에서 저마다 좋아하는 책, 도서관을 찾는 아이들에게 읽어 줄 그림책을 들고 웃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제 시할머니가 본인이 죽으면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어요. 그런데 남은 가족들은 생각이 달랐던 거지요. 이 책을 읽으며 지키지 못했던 시할머니 유언이 떠올랐어요.”

“저희 시아버지 유언은….”

5월26일 오전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구립 곰달래도서관 강의실. 6명의 아줌마들이 책상 위에 고 박완서 작가의 소설 <엄마의 말뚝>을 펼쳐 놓고 유언 이야기에 푹 빠졌다. 매주 한 차례 열리는 독서 동아리 ‘색연필’의 토론 자리다. 소설에서 엄마는 화장을 유언하지만, 자식들은 뜻을 어기고 매장을 한다.

색연필은 책읽는 엄마들의 모임이다. 활동하는 회원은 10명. 대다수 회원이 아이들의 학교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처음 만나 색연필을 시작했다. 당시 신정초등학교 1학년이던 아이들이 고등학교 1학년으로 훌쩍 자랐으니, 무려 10년의 긴 인연이다. ‘학부모’라는 점을 빼고는 나이, 고향, 성격도 모두 다르다. 여러 색깔이 어우러져야 멋진 그림이 나오듯 회원들의 개성을 한껏 살려 보자는 뜻에서 색연필이라 이름 지었다.

“도서관 뒷정리 정도의 봉사에 머물고 싶지 않았어요. 학부모로서 독서의 중요성을 깨닫고 책 읽어주는 엄마 모임을 조직하자고 의기투합했어요. 아이들 성장에 맞춰가며 책을 읽다 보니 그림책에서 동화책, 시, 고전까지 점점 독서 수준이 올라가더라고요.” 10년째 동아리를 이끌고 있는 손효순(50) 회장의 말이다.

색연필은 목요일 오전마다 2시간씩 한 주 동안 읽은 책의 감상을 서로 나눈다. 다독보다는 느리게 읽기를 지향하며 한 달에 한 권씩 다양한 분야의 책에 도전한다. 이를 위해 연간 읽을 책의 목록도 마련해 놓았다. 올해는 <엄마의 말뚝> 외에도 <미움 받을 용기>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를 함께 읽었다.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새로 목록에 들어갔다. 책을 미리 읽어 오기를 권하지만 의무사항은 아니다. 독서를 숙제처럼 여기면 부담감이 생겨 모임을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토론을 시작하기 전 책의 내용을 대강 정리한다.

김인숙(37) 회원은 “책은 많이 샀지만 대개 끝까지 읽지 못했어요. 그런데 색연필에 참여한 뒤로는 안 읽으면 대화에 낄 수가 없으니 열심히 읽게 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윤연옥(36) 회원은 “혼자 읽을 때는 책이 눈에 잘 안 들어와요. 그래서 먼저 읽기보다는, 토론을 하면서 관심이 생긴 책을 골라 읽는 편이에요. 다른 회원들과는 반대지요”라며 웃는다.

아이들에게는 책읽기를 ‘강요’하지만 정작 자신은 책을 멀리하기 십상인 엄마들이 함께 책을 읽는 이유는 뭘까. 색연필의 원년 멤버인 김혜선(45)씨는 “혼자 읽으면 혼자 생각하고 그걸로 끝인데, 동아리에서는 다양한 생각들을 나눌 수 있어서 좋다”며 함께 읽기를 권한다.


학부모 독서 동아리는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모임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색연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동아리와 달리 지역 도서관에서 해법을 찾았다. 때마침 2013년 곰달래도서관이 문을 열었고, 색연필은 자원봉사를 자청했다. 도서관 활성화를 모색하던 곰달래도서관 쪽도 이들을 반겼다. 도서관은 색연필에게 모임 장소 외에도 연간 30만원 정도의 책 구입비를 지원한다.

독서동아리 ‘색연필’ 회원 이지연씨가 도서관에 견학 온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다. 장철규 기자
곰달래도서관에 둥지를 틀며 색연필은 새로운 전기도 맞게 됐다. 독서를 넘어선 적극적인 공동 활동을 모색하던 중 서울시의 마을공동체 지원 사업으로 선정돼 250만원의 지원금을 받게 된 것이다. 손 회장은 “자율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독서 동아리에게 예산 지원은 독이 될 수도 있지만, 지원금을 문학기행 경비와 독서캠프 비용으로 대부분 썼으니 색연필로서는 더 멀리 날기 위한 날개를 단 셈이 됐다”고 말했다. 색연필은 학교, 지역 도서관과 손을 잡고 달빛독서, 토론, 문학기행, 책잔치를 하며 도서관 문화 활성화에 나섰다.

활동 영역이 점점 넓어지자 집에만 있던 회원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김인숙 회원은 2일 곰달래도서관에서 열린 ‘모기퇴치제 만들기’ 체험 강사로 나섰다. “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동남아’였어요. 동네에 남아 있는 아줌마요. 하지만 모임에 참여한 뒤 인형극, 토털 공예 등을 배우니까 점점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지금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지요. 저보다 아이들이 엄마의 변화를 더 좋아하고 응원해 줘요. 처음 색연필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제 삶이 이렇게 많이 변할 줄은 몰랐어요.” 이지연(46) 회원은 “전 성격이 소극적이어서 처음 모임에 와서도 조용히 앉아만 있었는데, 다른 분들 보면서 자극을 많이 받아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어서 창의적 글쓰기나 동화 구연 수업도 찾아 듣고 있어요. 색연필은 저를 집 밖의 세상으로 나오게 해 주었어요”라며 수줍게 말했다.

전업주부인 회원들이 저마다 토론, 전래놀이, 책놀이, 북아트 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그래도 색연필의 중심은 독서임을 잊지 않는다. “자주 보는 게 제일 중요해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책 읽을 짬을 내기가 쉽지 않아요. 완독에 대한 부담이 없어야 모임이 편해져요.” “색연필에는 여름·겨울방학이 있어요. 때로는 쉬는 시간도 필요해요.” 저마다 얘기하는 색연필의 ‘10년 장수’ 비결이다.

윤지혜 기자 wisdo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