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개’가 ‘황금정’ 되었다가 다시 ‘을지로’가 된 사연

유영호의 우리 동네 어슬렁 산책│명동 일대

등록 : 2019-10-31 14:45
누런색 진흙이 많아 ‘구리개’였던 곳

일제 때엔 최고 번화가로 황금의 땅

해방 뒤 이곳에 많이 살던 화교 의식

살수대첩 떠올리는 을지문덕을 소환

1970년대까지 소비와 금융의 중심지

증권거래소 등 여의도로 이전하고

강남 개발 본격화하면서 쇠퇴했으나

지금은 외국관광객 소비지로 ‘부활’


조선시대 명동은 한성부 남부 명례방이라 했는데,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수 양호가 이곳에 진을 치고 숭례문의 종을 가져다 언덕 위에 걸어놓은 뒤로 종이 있는 고개라 하여 ‘종현’이라 불렸던 곳이다. 또한 청계천 이남이 전체적으로 사대부 등 권세가보다는 군졸과 양민의 거주지였듯이 명동도 주로 양민 주거지였다. 그러나 1883년 필동에 일본공사관이 신축된 이후 충무로 일대가 일본인 거주지로 변하면서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의 지명을 명례방의 ‘명’ 자를 따서 명치정(明治町)으로 지었다가 해방 뒤 지금의 명동이 된 것이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개발은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충무로1~2가 일대가 상업지구로 개발되면서 인근 명동도 점차 상업지구로 개발되었고, 이후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 소비와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79년 증권거래소의 여의도 이전과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크게 위축되었다가 최근 중국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소비지로 떠오르고 있다.

오늘의 산책은 일제강점기 선은전광장이라 불렸던 지금의 한국은행 교차로에서 시작하자. 광장 주변에 고풍스러운 건물이 많은데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은 조선은행(1909), 신세계백화점은 미쓰코시 경성점(1930), 옛 제일은행 본점은 조선저축은행(1935) 등으로 일제강점기 지어진 것들이다. 또한 서울중앙우체국은 비록 건물은 현대식으로 변했지만 이곳은 경성우편국이 있던 곳으로, 거리의 역사성을 품고 있다. 70년대 이후 강남이 집중 개발되면서 테헤란로가 번화가로 바뀌었듯이, 일제강점기에는 청계천 이남이 집중 개발되면서 이처럼 남대문로가 최고의 번화가였다.

현재 내부 공사로 출입을 금하고 있는 서울한성소학교.

한편 중앙우체국 뒤로 한성화교소학교와 중국대사관이 나란히 있다. 이곳은 본래 포도대장 이경하의 집이었으나 임오군란(1882) 이후 청군이 주둔하였으며, 군란 진압 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었고, 초대 상무총판 천수탕(진수당)에 이어 위안스카이(원세개)가 머물며 조선의 국사를 쥐락펴락하던 곳이다. 따라서 조선 땅에서 화교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한성화교소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정식 인가를 받은 최초의 외국인학교로 가수 주현미, 배우 하희라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그 뒤편 사보이호텔은 1975년 조양은이 당시 서울 주먹계 원로들의 신년회를 습격하며 주먹계 판도를 바꾼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중국대사관에서 남대문로를 따라 약 200미터쯤 건물 신축으로 공터로 남아 있는 곳은 1948년 10월부터 약 8개월간 활동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있던 곳이다. 해방 뒤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치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나치 강점 4년의 프랑스는 나치 협력자 767명을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약 4만5천 명의 공민권을 박탈했다. 그러나 일제강점 40년의 우리는 단 한 명의 친일파도 처형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과거 청산이 사회갈등 요인으로 남아 있는 현실이다. 한편 반민특위 터 바로 옆에 있는 남대문로 한전 사옥은 1928년 건립된 경성전기 사옥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 을지로1가와 2가 사이에는 본래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는데 진흙으로 되어 매우 질고 누런색을 띠어 ‘구리개’라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를 한자로 옮겨 황금정(黃金町)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해방되고 새로운 가로명을 제정하면서 이 일대에 많이 살던 중국 화교를 의식해 살수대첩으로 중국을 크게 무찌른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을지로라 지었다. 을지로는 일제강점기 1913년 확장되고 직선화된 도로로, 서울에서 가장 먼저 인도와 차도가 분리된 근대식 도로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조선 수탈의 양대 기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등이 이곳에 들어서면서 중심가로가 되었으며, 이에 1926년 두 곳은 모두 나석주의 폭탄 세례를 받게 됐다. 현 KEB하나은행 본사 옆에 나석주 동상이 있다.

이제 명동 중심으로 들어가면 이내 명동예술극장이 보이는데 이 건물 역시 1936년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건물로 당시 명치좌(明治座)라는 극장이었다. 해방 뒤에는 서울시 공관으로 사용되며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그 이듬해부터 1973년 남산국립극장이 개관될 때까지는 국립극장으로 사용되며 우리나라 문화예술이 펼쳐졌던 공간이었다. 이후 민간에게 넘어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헐릴 위기에 놓이자 문화관광부가 매입하여 지금의 명동예술극장으로 재탄생된 곳이다.

이제 명동 중심길인 소위 ‘명동길’을 따라 동쪽 언덕을 오르면 좌우로 우리 현대사에 등장하는 명동성당과 YWCA가 있다. 1898년 완공된 명동성당은 당시 지명을 따서 종현성당이라 불리던 것이 해방 뒤 변경된 지명에 따라 지금의 명동성당이 됐다. 한편 명동성당은 친일파 김활란, 유각경 등이 주도하여 1922년 설립된 YWCA와 더불어 일제강점기에는 친일로 기울었으나 해방 뒤 특히 70~80년대 군부정권에서는 민주화운동의 기지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90년대 중반 이후 통일운동에는 침묵하는 모습이다. 18살에 세례를 받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 천주교가 금하는 ‘살인 행위’라며 1993년까지 신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결국 서양 종교라 그런지 ‘민족’에 인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