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10일부터 6·29선언이 있기까지 약 20일 동안 계속된 민주화 시위'. 6월민주항쟁에 대한 <한국근현대사 사전>의 정의다. 다시 6월이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자는 그것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는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게, 2016년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역사가 퇴보하지 않고 발전하려면 기억과 행동이 필요하다. 6월이 가기 전에 함께 명동을, 연세대를, 시청앞 광장을 걸어 보자. 개발 바람에 풍경은 변했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정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29년 전 6월은 전 국민을 민주화의 바람으로 한데 묶었다. 희뿌연 최루탄 가루가 요즘의 지독한 미세먼지처럼 흩날렸던 그때의 명동 거리는 민주주의 교육의 현장이었다. 남대문시장의 내려진 셔터는 온 국민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갈망한다는 증거였다. 6월 그 길을 걸으면서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 역사를 써 나가던 그날들을 되살려 보자.
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념관추진단장 양금식,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한겨레> 자료사진
① 민주항쟁의 신호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은 갈월동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민주화추진위원회’ 관련 수배자의 행방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경찰은 물고문을 자행해 박군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경찰은 고문치사를 숨기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코미디 같은 거짓 발표를 했고, 이후 이 사건은 독재정권에 대한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고문 철폐’는 누구나 따라 외치는 대중적인 구호가 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다.
경찰청은 2005년에 이 시설의 용도를 인권센터로 변경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는 2008년에 박종철이 죽음을 맞았던 509호를 재현하고, 당시를 회상하고 인권교육도 병행할 수 있는 전시관을 열었다.
박종철군을 고문치사한 과거의 남영동 대공분실은 현재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변모했다.
② 민주항쟁의 불꽃이 된 이한열
6월9일,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은폐 규탄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 행사에 참가한 연세대 2학년 이한열군은 정문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7월5일 사망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그를 친구가 끌어안고 있는 사진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분노한 많은 시민들이 항쟁 대열에 나서자 결국 독재 세력은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6·29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6·29선언 직후인 7월8일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해 애도와 함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킬 것을 다짐하였다. 연세대학교에는 이한열 기념비와 피격지점 안내판이, 마포구 노고산동에는 이한열기념관이 마련돼 있다.
③ 6월민주항쟁의 성지 명동성당
1987년 당당하게 명동성당 언덕길을 내려오는 학생과 시민들의 모습은 6월민주항쟁의 대표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주변 빌딩에서는 시위대에게 응원 편지와 성금 봉투가 쏟아졌고, 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철거민들은 학생들에게 밥과 라면을, 인근 여고생들이 학교 담장 위로 자신의 도시락을 넘겨주며 그들을 지지했다.
명동성당에서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됐고, 1976년 야당과 재야인사들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87년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조작을 폭로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들의 배경이 된 곳이다. 하지만 격동의 현장을 말해 줄 수 있는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1988년 5월15일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외치며 할복 투신한 서울대생 조성만의 기록도 외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명동은 민주화운동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명동성당 앞에는 친일 매국노 이완용 척살을 시도한 이재명 의사의 의거를 소개하는 표석이, 서울 YWCA 근처에는 이회영 일가를 기억하는 소공원이 있다. 지금의 KEB하나은행은 옛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던 곳으로, 나석주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동상이 있다. 또한 이곳은 4·19혁명 당시에는 내무부가 사용하고 있어서 희생자가 많이 나온 현장이기도 하다.
④ '국본'이 탄생한 향린교회
재개발 공사로 소란한 을지로2가. 작은 향린교회는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향기 나는 이웃’이 되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이 교회에서 1987년 5월27일 경찰의 감시를 따돌린 재야인사 150여명이 3층 예배실에 모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이후 ‘국본’으로 알려진 이 조직이 6월민주항쟁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조직이 없었다면 6월민주항쟁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향린교회 정문 기둥에는 2007년 6월3일에 20주년을 기념해 붙인 ‘6월민주항쟁 기념비’가 있다.
⑤ 6월민주항쟁의 진원지 대한성공회
성공회성당으로 줄여 말하기도 한다. 1987년 6월10일 열린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 이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됐다. 경찰의 봉쇄를 피해 성공회성당으로 미리 들어온 재야인사들과 시민들은 오후 5시경 4·13호헌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미사를 올리고, 오후 6시부터 국민대회를 시작했다. 특히 정오에 울려 퍼진 마흔두 번의 종소리는 통일을 기원하는 종소리로 알려져 있다.
‘6월민주항쟁 1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는 이날을 기념하여 1997년 6월10일 성공회성당 뒤편에 ‘유월민주항쟁진원지’ 표석을 설치했다. 성공회성당 앞 서울시의회 건물은 과거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됐다. 1960년 4월18일 고려대 학생시위대의 최종 목표 지점이었고, 4월25일 교수단 시위의 최종 종착지이기도 한 4·19혁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건물에는 2010년 ‘제50주년 4·19혁명기념사업회’가 설치한 표석이 있다.
⑥ 민주주의 교육현장이 된 남대문시장 일대
1987년 6월, 대규모 도심 행사가 열린 날에는 거의 대부분 남대문시장 일대에서 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1987년 6월10일, 군중들은 신세계백화점 앞 분수대에서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에 밀려나 회현동 남산3호 터널 입구에서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다. 학생과 시민들이 경찰의 진압을 피해 남대문시장으로 들어가면 상인들은 그들을 숨겨 주었다. 일부 상인들은 가게를 닫고 시위에 참여했다. 남대문시장은 자연스럽게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고, 평범한 시민들은 민주주의 역사의 주역으로 변화되어 갔다.
⑦ '서울의 봄'을 함께 꿈꾸던 서울역 광장
1980년 5월15일, ‘비상계엄 해제’와 ‘정치 일정 단축’ 등을 요구하며 3일째 거리집회와 시위를 벌이던 수도권 학생과 시민 10만여명이 서울역 광장에 집결했다. 소위 말하는 ‘서울의 봄’이 정점에 달했던 순간이다. 학생들은 신군부의 강경책을 우려해 시위를 당분간 중단한다는 ‘서울역 회군’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서울의 봄’의 종말로 이어져 아쉬움을 남겼다. 1987년의 항쟁에서도 서울역은 거리정치의 중심지들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국민평화대행진’이 개최되었던 6월26일 서울역 일대에서는 군중 수만명이 경찰의 폭력에 맞서 저항했다. 이날의 행진에는 전국 34개 도시 270여 곳에서 백만명이 훨씬 넘는 국민이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⑧ 모두가 하나되는 경험을 간직한 서울광장
서울광장은 세월에 따라 모습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언제나 역사의 중요한 현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3·1운동, 4·19혁명, 한일협정 반대운동, 6월민주항쟁, 촛불시위 등이 이곳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이한열군의 노제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100만 인파는 시청 옥상에 조기를 걸도록 요구했다.
광장에서 외치는 군중의 함성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의기는 오래도록 강렬하게 뇌리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응원과 2008년의 촛불집회 등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가는 경험은 광장의 위력을 실감하게 한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