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곳곳 일제 흔적…잊지 않기 위한 ‘기억의 터’ 우뚝
유영호의 우리 동네 어슬렁 산책│예장동과 남산 일대
등록 : 2019-11-14 14:20
남산원 마당에는 ‘노기 신사’ 잔해
김구 동상도 친일파가 만들어 치욕
남산 곳곳엔 중앙정보부 흔적 남아
‘박정희 고문 정권’ 민낯 곳곳 드러내
신사참배 거부했던 평양 숭의여고
폐교된 뒤 그 이름 남산에 남고
통감부 터엔 2만명 시민의 성금으로
‘위안부 기억 터’ 건립…역사 새길 다짐
지하철 4호선 명동역 남쪽에 해당하는 중구 남산동과 예장동 일대를 돌아보고자 한다. 답사의 출발은 명동역이다.
먼저 예장동은 조선시대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훈련장인 예장이 있던 데서 비롯되었다. 무예장을 줄여 예장으로 불렀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랬던 이곳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청계천 이남 지역이 그랬듯이 일본인들이 주로 살던 곳으로 변했다. 오늘의 답사와 이야기 역시 그 흔적을 따라가고자 한다. 그럼 남산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 남산동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보자.
올라가다 약간 숨이 차다 싶을 때쯤이면 이내 소파로 건너편의 숭의여대를 만난다. 숭의여고도 함께 있었지만 2003년 대방동으로 이전했고, 현재는 초등학교와 대학이 사용하고 있다.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 경성에 머물던 일본인을 위해 1898년부터 경성 신사가 있던 곳이다. 정문에서 올라가는 계단이 아직 남아 있으며, 운동장 한쪽에 다른 흔적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학교는 신사에 대한 것보다 설립 과정에 우리 현대사가 압축되어 있다. 숭의여고는 본래 평양에 설립되었지만 신사 참배 거부로 폐교되었다. 이곳에 세운 학교는 자유당 시절 무임소장관을 하던 박현숙이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사실 이곳은 공원 용지라 학교 설립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권력을 등에 업고 학교를 지은 것이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은 허가를 안 내주다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다음 조건으로 건축을 허가했다. “가건축이며, 당국의 지시에 따라 언제든지 철거할 수 있고, 이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각서를 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합의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지시로도 허물 수도 철거할 수도 없는 겹겹의 철옹성이 되어버린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이 학교 운동장 한편에는 안중근 의사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이 동상을 만든 사람은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조각가 김경승(1915~1992)이다. 친일파 김경승은 이뿐만 아니라 남산에 있는 김구상과 국회의사당에 설치된 세종대왕상과 충무공상도 만들었다.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친일파가 만드는 역설적인 현실을 볼 수 있다.
숭의여대 바로 옆에는 리라초등학교가 있는데, 이곳 역시 일제강점기 노기 신사가 있던 자리며, 그 흔적이 리라초 뒤편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에 남아 있다. 노기 마레스케(1849~1912)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1912년 메이지 일왕이 사망하자 아내와 함께 할복자살한 일본 군인이다. 일본에서는 노기 신사를 야스쿠니 신사나 메이지 신궁과 더불어 국가가 공인하는 ‘국가주의 성전’으로 여긴다.
한편 리라아트고는 리라초교 설립자인 권응팔이 전쟁 시기 부랑아 소년 등 우범 집단을 데려다 간단한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소년학교’에서 시작했다. 1957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이를 높게 평가해 이곳 노기 신사 터를 내줘서 설립된 역사가 있다. 리라초등학교라는 이름도 1965년 권응팔의 장녀 리라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아예 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당시 병아리를 닮은 딸을 위해 병아리 모양의 교모를 만들었고, 교복은 물론 교사의 색깔도 노란색으로 통일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의 딸 권리라가 현재 교장을 하고 있다.
리라초 옆의 남산예술센터는 1907년 조선통감부가 있던 곳으로 이것이 경술국치 뒤에는 총독부로 이름을 바꿔 1926년까지 있었다. 또 그 건너편 현재 한양교회가 있는 곳은 일본 사찰 동본원사가 있던 곳이다.
이제 ‘서울 문학의 집’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이 일대는 온통 우리 현대사의 검은 권력의 핵심인 중앙정보부(1961년 설립, 1981년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 1999년 현 국가정보원으로 개칭)가 있던 곳이다. ‘남산 중정’은 그야말로 우리 현대사에서 ‘피의 역사’가 쓰인 곳이다. 많은 건물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곳에는 예전 건물들이 간판을 달리한 채 남아 있다. 문학의 집은 중앙정보부장 공관이었으며, 그 옆의 산림문학관은 중앙정보부장 경호원들의 숙소였다. 또 서울소방재난본부는 중앙정보부 행정동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그리고 안쪽 서울유스호스텔이 중앙정보부 본관 건물로 이곳은 최종길 교수가 고문으로 숨진 뒤 자살로 위장된 곳이기도 하다. 또 이 건물은 바로 앞에 있는 서울종합방재센터와 지하 3층에서 연결되어 있는데 이곳은 과거 중정 지하벙커가 있던 곳으로 수많은 사람이 끌려가 고문 속에서 간첩으로 만들어졌던 곳이다. 한편 현 남산창작센터는 중정 요원의 체육관으로 쓰였던 곳이며, 맨 끝의 서울시청 남산 제1별관도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던 대공수사국이 있던 곳이다.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장소는 문학의 집에서 서울유스호스텔로 가는 길에 지금은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로 꾸며진 곳이다. 이곳은 조선통감(이후 조선총독) 관저가 있던 곳으로 조선이란 국체가 사라진 경술국치의 현장이다. 그 치욕의 현장을, 위안부 문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조용하지만 커다란 외침의 장소로 만든 것이다. 2016년 사회단체, 정계, 여성계, 학계, 문화계, 독립운동가 후손 등이 모여 ‘기억의 터’ 조성 국민모금을 시작했고 1만9754명이 참여해 목표액을 달성했다. 설치미술가이기도 한 임옥상 화가가 중심이 돼 ‘대지의 눈’ ‘통곡의 벽’ ‘세상의 배꼽’ 등의 시설물을 갖췄다.
우리는 이 경술국치의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만을 기억한다. 하지만 또 한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필자가 학창 시절 ‘최초의 신소설’이라 배운 <혈의 누>의 작가 이인직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일본에 유학했으며,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 통역관을 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일본말을 못하는 이완용의 비서로서 경술국치의 실무자였다. 그가 쓴 <혈의 누>라는 소설도 고아가 된 주인공 옥련을 일본 군의관이 구해주고 교육해주는 등 일본인을 은인으로 묘사한다. 소설 제목 역시 우리말로 ‘피눈물'이며 이를 한자로 표기해도 ‘혈루’(血淚)가 옳은 말임에도 일본식 표기인 ‘血の 淚’를 그대로 직역하여 ‘혈의 누’라고 표현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이인직을 ‘신소설의 개척자’로 칭송하며, 그의 소설도 여전히 일본식 문법으로 표기하고 부르는 현실이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경성 신사가 있던 곳으로 당시의 신사 계단을 현재도 여전히 사용하는 숭의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