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국립묘지’ 장충단에 일제는 이토 사찰 지어…
유영호의 우리 동네 어슬렁 산책│장충동 일대
등록 : 2019-12-26 14:25 수정 : 2024-06-05 09:20
을미사변 때 희생된 충신 추모 장춘단
조선총독부, 1919년 공원으로 바꾼 뒤
1932년 이등박문 추모 박문사 세워
사찰 사라졌지만, 장충단 정신 잊혀
1967년 적산 불하로 탄생한 신라호텔
대문 안 108계단에 박문사 흔적 남아
1963년 장충체육관 단장 뒤 인파 몰려
북한음식 족발 인기에 ‘족발 골목’ 탄생
오늘은 동대문에서 장충동 일대로 걸어보자. 먼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마주 서 있는 건물은 우리 건축사에서 김수근과 더불어 양대 거장이라 불리는 김중업의 서산부인과(현 아리움 사옥)이다. 남녀의 사랑 속에 새 생명이 탄생하는 공간을 남근과 자궁 모양으로 형상한 건물로서 이런 건물이 1966년에 탄생했다는 것이 놀랍다.
한편 건너편 광희문은 퇴계로 확장으로 비록 15m쯤 남쪽으로 밀려났지만 한양도성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 도성 안에는 묘를 쓸 수 없어 시신이 빠져나가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이라 불리기도 한 곳이다. 따라서 광희문 밖은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던 곳이며, 이곳에는 무당들의 신당(神堂)이 많아 이곳 지명을 신당동이라 했지만 갑오개혁 때 민원에 의해 같은 발음에 의미를 달리하는 신당(新堂)으로 바꾼 것이다.
이제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한국 건축사에서의 또 한 명의 거장 김수근이 설계한 경동교회를 만난다. 김중업은 박정희의 파괴적 도시개발에 저항하다 결국 망명생활을 해야 했지만, 김수근은 그 반대편에서 정권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한 건축가로 무척 대비되는 인물이다. 장충동 끝자락에 위치한 반공의 전진기지로 설립된 자유센터와 옛 타워호텔(현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도 김수근이 설계한 것이다.
참고로 경동교회, 영락교회, 서울성남교회 등 3곳은 모두 그 설립자가 월남자들이며, 일본 천리교 건물을 적산으로 불하받아 세운 교회들이다. 따라서 세 곳 모두 1945년 12월2일로 창립일이 같다. 그 후 영락교회는 서북청년단을 주도하고 교회의 대형화를 이끌었지만 경동교회는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그 설립자와 설립 과정의 한계로 마치 ‘헌법 안의 진보’처럼 ‘반북 안의 진보’로 자신의 진보성을 가두며 변화하는 통일시대에 앞장서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교회를 나와 다시 남쪽으로 걷다보면 ‘장충동족발골목’이 있는데, 이곳이 족발로 유명해진 것은 장충체육관 때문이다. 1955년 육군체육관으로 시작한 이곳이 서울시 인수 뒤 1963년 새 모습으로 탄생돼 각종 체육경기와 문화행사가 열리면서 사람이 몰렸다. 이런 사람들의 배를 채우며 술안주로도 적합한 먹거리가 필요했고, 당시 이 일대에 주로 거주하던 월남민들이 그들에게 익숙한 북한 음식이던 족발을 제공한 것이다.
족발골목을 지나면 장충교회 뒤편으로 삼성그룹의 패밀리타운이 있다.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의 집은 용산구 한남동에 있지만 장충동은 창업자 이병철의 집(현 이건희 소유)이 있는 곳으로 이들에게는 본가와 같은 장소다. 따라서 이 일대는 이건희, 이재현, 이명희, 이맹희 등 삼성가의 주택이 밀집되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살았던 집도 있다.
이제 장충단로를 건너 신라호텔 쪽으로 가보자. 그 입구는 현대식 호텔과 달리 우진각지붕의 한옥 대문이다. 우진각지붕은 ‘건물 사면에 지붕면이 있고 추녀마루가 용마루에서 만나게 되는 지붕’을 뜻하는데 그 추녀마루에는 궁궐전각에만 올려지는 장식기와인 ‘잡상’이 놓여 있다. 현재 신라호텔 영빈관 위치에 1932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추모 사찰인 박문사를 짓고,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왔기 때문이다. 물론 사찰은 해방 뒤 철거되고 1967년 영빈관이 들어섰지만 박정희 정권의 재벌 관리 방식의 하나로 삼성에 불하되어 지금의 신라호텔이 들어서 있는 것이다. 경희궁이 복원되면서 흥화문은 다시 원위치로 갔지만 신라호텔은 여전히 옛 모습 대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대문에서 영빈관으로 들어가는 108계단은 박문사의 유일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신라호텔의 설계를 일본 다이세이건설에 맡겼는데, 바로 이 회사는 일제강점기 이곳에 설치되었던 장충단을 허물고 세운 박문사를 설계한 회사다.
현재 신라호텔 북쪽에 위치한 장충단은 을미사변 때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기리기 위해 대한제국 고종이 쌓은 제단이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묘지이자 반일의 상징이었다. 이에 일제는 1919년 이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이어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세웠다. 이런 일제의 배척과 해방 뒤 무관심 속에 현재 장충단비만 외로이 남겨져 있다.
한편, 해방 뒤 철거되었지만 이곳 장충단공원에는 육탄삼용사라는 동상이 있었다. 이들은 제1차 상하이사변(1932) 당시 장렬히 전사한 일본군으로 당시 <아사히신문>이 크게 보도하면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다. 하지만 2007년 신문사는 당시 기사가 가짜뉴스라고 고백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파주 통일공원에 설치된 육탄10용사 동상이 있다. 하지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 참전자 증언록>(2003)에 의하면 소대장의 실수로 10명이 포로가 되자 그에 대한 책임 회피를 위해 영웅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매년 5월이 되면 포로가 된 이상한 영웅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치러진다. 이는 일제의 만주 침략을 위한 가짜뉴스를 한국전쟁 시기에도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셈이니 이 모든 것은 분단이 그 원인일 것이다. 현재 수많은 난관이 놓여 있지만 북-미 평화협정이란 대세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평화와 화해 속에서 통일을 이야기하는 시대가 오면서 이런 가짜뉴스가 모두 걷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보며 오늘의 산책과 상상을 정리하자. <끝>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반공대회의 편의를 위해 건설된 타워호텔은 한양도성을 파괴하여 도로변을 성돌로 꾸몄다.(왼쪽) 북쪽을 향해 자유의 물결이 파도치듯 설계한 김수근의 자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