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기의 서울 골목길 탐방

굴레방다리 위 비탈길에는 붉은 깃발 나부끼고…

서대문구 북아현동 골목길

등록 : 2016-06-16 14:30 수정 : 2016-06-17 10:18
북아현동 구릉지에 있는 경의선 철도 위로 기차가 지나고 있다. 의영터널과 아현터널 사이에 간이역 ‘아현리역’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이 옛 역 근처 철길 아래에 북아현로가 뚫려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아현역에 내려 굴레방다리 근처에서 걸어 올라가면 한 집 건너 한 집에 붉은 깃발이 꽂혀 있다. 무슨 일일까? 미아리고개 아래 말고도 점집이 이렇게 많은 데가 있을까? 제법 넓은 골목 양편에, 그리고 아주 좁은 골목 안에도 ‘적기’가 꽂혀 뭔가를 말하고 있다. 뭘 이야기하고자 하는 걸까? ‘아현동 가구거리’가 있는 북아현동 어귀에서 과일과 채소를 시장바닥에서처럼 펴놓고 파는 ‘강진상회’ 앞을 지나며 40대 후반의 가게 주인에게 “아직도 강진상회네요!” 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아직도 카메라 메고 다니시네요” 한다. 이 가게의 큰 자랑은 신속배달이다. 대형마트도 아닌데 신속배달이라니….

제법 가파른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80년대 유행했던 ‘맨션’이란 이름의 ‘북아현맨숀’이 여태 서 있다. 6층 높이의 아파트 동들은 높낮이가 다르다. 당시만 해도 지형을 많이 변형하지 않았단 얘기다. 요즘 아파트 건설과 달리 ‘순진한 건설’ 방식이 아닐까. 단지 안에는 장독대도 보이고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붉은 고추, 풋호박 같은 것들을 썰어 말리거나 엉성한 경계 철망에는 가지를 빨래처럼 널어 말리고 있다. 80년대 풍경이라 할 만하다.

북아현동에는 ‘아현리역’이라는 철도역이 있었다. 처음 경의선이 서울 용산에서 출발해 평안북도 의주까지 가게 될 때는 역도 없었고 마을도 없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가 되자 ‘신촌역’이 생겼고 아현리 골짜기에도 마을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930년대가 되자 기차역이 생겼다. 바로 간이역 ‘아현리역’이다.

북아현동 금화시민아파트 전경(1969년 3월26일 촬영). 1969년 1월4일 기공식을 한 이 이파트는 4월21일 준공식을 했다. 이처럼 조기 완공을 목표로 밀어붙인 시민아파트 부실 공사는 1970년 4월8일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건으로 중지되었다. 아파트 앞에 줄지어 늘어선 근대식 한옥들은 대접을 받지 못했고 지금은 그 흔적마저도 찾아볼 수 없다.

북아현동 구릉지, 지금은 추계예술대학교 건물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지만 그 대학 앞쪽에 옛 역이 있었다고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동안 이름도 들어 보지 못했고 거기에 기차역이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터이다. 아현터널과 의영터널 사이에 있었던 이 역은 1944년에 폐역이 되어 15년의 짧은 생을 살다 사라졌다. 아현터널 위의 철망 울타리 앞에 서서 철길 위의 옛 역 흔적을 내려다본다.


왜 갑자기 사라졌을까? 일제는 1930년에 주로 유람용인 ‘경성순환선’이란 것을 만들었다. 이것을 용산교외순환선이라고도 하고 경룡교외순환선이라고도 했는데, 식민지 지배를 안정적으로 하기 위한 문화통치 수단으로 보인다. 옛 신문에는 ‘백설 자욱한 당인리 옛추억’(1930년 12월26일치 <동아일보>)이라고 자못 감상적으로 썼던 기사가 있다. 어쨌거나 일제는 서울역과 신촌역 사이에 서소문역(지금의 서소문 건널목)과 아현리역을 만들고 용산선의 원정역, 미생정역, 공덕리역 등을 이어 순환선을 만들었다. 그러던 이들 간이역들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수세에 몰리자 폐쇄돼고 뜯기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갈 무렵 경성순환선과 용산선 위를 달리던 기동차를 공출해 간 것이다. 심지어 아현리역과 서소문역은 건물마저 뜯어 갔다고 한다.

북아현동 초입의 채소·과일 가게는 상품을 가지런히 진열하지 않았다. 바로 들어오고 바로 나가는 신선한 것들을 진열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이 철도가 지나는 아현터널 위에는 이제 붉은 깃발이 많이 사라졌다. 대신 빈집이 늘어났다. 그러나 마을 정자에는 노인들이 앉아 여전히 더위를 식히고 있다. 아까 저 아래에서 보았던 ‘강진상회’의 신속배달은 여기까지 바로 배달한다고 했다. 노인들이 많은 이 동네에서 주문만 하면 집까지 배달해 주며 신선한 채소·과일만 팔기 때문에 굳이 잘 진열할 필요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단다.

왜 이렇게 사라지는 게 많을까?

경기대로를 지나 금화산 꼭대기에 이르자 작년까지 있던 금화시범아파트는 사라지고 없다. 이제는 황량한 나대지가 되어 서울 시내를 굽어보고 있을 뿐이다. 이 인근에 시민아파트가 처음 지어질 당시 시민아파트의 신화를 쓴다고 했다던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그걸 바라보며 흐뭇해했다고 한다.

1960년대 말, 서울시의 절대적인 주택 부족과 판자촌 등 불량 주거지를 한 번에 해결하는 방안이 이른바 ‘시민아파트’ 건설이었다. 박정희 정부와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만나 지은 ‘시민아파트 1호’인 금화시민아파트는 1969년 1월4일 기공식을 했다. 당시 수백 동의 공동주택(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을 세우고, 금화산 부근에도 북아현시민아파트, 금화시민아파트 등 아파트 수십 동을 동시에 지어올렸다. 결국 다음 해인 1970년 4월8일 새벽 와우시민아파트가 무너져 33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나자, 시민아파트 사업은 중지되었다. 그리고 이 사고를 만회하려고 시범아파트 네 동을 더 지었는데, 지난해에 철거된 마지막 두 동이 그것이다.

골목과 도로변에 꽂혀 있는 붉은 깃발을 보고 점집인가 생각한 것은 잘못되었다. 흰 깃발을 건 점집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북아현동에 또다시 우후죽순 아파트가 들어서려고 하는데 이제는 고민이 깊어지는 모양이다. 금화시범아파트 터 언덕 아래 산책 나온 장성남(75)씨는 이 동네에서 30년째 살고 있다 한다. “자기 땅이 40평이면 아파트 33평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땅이 30평이면 2억 대출을 받아야 된대요”라며 재개발에 대해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면서 “그 깃발이요? 점집 아니에요. 재개발 반대 깃발이에요.” 그러고 보니 아까 올라오다 본 붉은 깃발들의 정체가 밝혀진 셈이다.

글 김란기 ‘살맛나는 골목세상’ 탐사단 운영 문화유산연대 대표

사진 김란기,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