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한 장인정신 있어야 ‘반짝 아이디어’ 더 빛난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④ 성수동, 신데렐라 구두와 새 카페
등록 : 2020-02-13 16:30 수정 : 2020-02-13 16:48
성수역 주변 515곳 수제화 업체 몰려
그 사이 첨단 디자인 카페들 불쑥불쑥
대림창고·자그마치·성수연방 변화 선두
그러나 성수동 골목길 재생 진행하며
꼼꼼한 장인정신도 재생시켜야 성공
18세기 후반 청나라 수도를 방문했던 조선 여행자들 가운데 화려한 대로보다는 시장과 후퉁(胡同·골목)에 주목했던 이들이 있었다.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이다. 후퉁은 베이징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말하는 것으로 채소 가게와 빨랫줄에 걸린 형형색색의 속옷들, 생활의 모든 곳이 있는 곳이다. ‘후퉁을 천천히 걷는’(胡同漫步) 행위를 통해 실학 정신이 잉태됐다. 골목길 걷기의 위대함이다.
지난 회의 뚝섬역에 이어 오늘은 지하철 성수역 주변 골목길이다. 지하철을 타고 성수역에서 내렸다. 2층 보행자 통로 공간은 온통 수제화와 구두 관련 전시로 가득하다. 전시자료를 둘러보다 질문 앞에 깜짝 놀랐다.
“구두는 순우리말일까?” 나는 구두가 순수 한국어인 줄 알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아니었다. 구두는 개화기에는 서양 신발이라는 뜻의 양화(洋靴)로 불렸다. 이후 일본에서 제화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서울에 양화점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구쓰’(くつ)라는 일본말을 그대로 쓰다가 점차 구두로 변했다는 것이다. 구쓰는 신발 화(靴) 자의 일본어 발음이다.
지하철 안내판을 따라 1번 출구로 나가 성수 수제화타운으로 향하는데, 2번 출구가 접근에 더 편한 듯싶다. 고양이가 올라탄 장화, 붉은 구두, 발의 문양이 새겨진 기념 동판과 함께 수제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문제는 판로’라는 인식 아래 한곳에 뭉치게 됐다고 한다. 자료에 따르면 성수동에는 모두 515곳의 수제화 업체가 있고, 이 가운데 완제품 여성화는 217곳에서 만드는 데 반해 완제품 남성화를 다루는 곳은 29곳에 그친다. 여성화 비중이 거의 10배나 된다.
길을 건너 성수역 3번 출구 쪽으로 향하면 그 옆으로 난 큰길이 ‘성수이로’다. 흔히 ‘성수동 카페거리’로 알려진 이 동네의 주축 거리다. 공장과 갤러리가 뒤섞여 있고, 수공업 상점과 카페가 뒤섞여 있다. 붉은 벽돌의 빈티지 건물 사이로 첨단 디자인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이 거리의 혁신을 주도한 것은 ‘대림창고’다. 원래는 정미소로 지어졌다가 나중에는 물류창고로 사용되던 건물을 예술가 몇 명이 인수한 뒤 이를 개조해 2011년 ‘대림창고 갤러리 칼럼’으로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2014년에는 같은 거리에 인쇄공장을 카페로 리모델링한 ‘자그마치’가 문을 열었다. 성수동이 ‘서울의 브루클린’이라는 별명을 듣게 된 것은 그즈음부터다.
대림창고 옆에는 이보다 더 천장이 높고 규모도 훨씬 더 큰 복합공간이 새롭게 들어섰다. 바이산(Baesan)이 그곳이다. 화려한 벽화가 그려진 곳을 지나 문을 열자 벤츠 자동차 반토막이 반긴다. 높은 천장이 있는 중간 지대는 전시공간이다. 한가운데 놓인 철판은 수명이 다한 선박에서 가져왔다. 날씨가 춥지 않을 때는 루프톱에 나가 맥주를 마시면서 동네를 살펴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340평 규모의 창고형 갤러리 카페 겸 다이닝펍이다. 공장 외관을 그대로 살리고 옛날에 쓰던 기계나 물건들을 인테리어로 훌륭하게 살리고 있다. 모던과 빈티지가 뒤섞여 있다. ‘론리플래닛’은 ‘아시아에서 가장 휘황찬란한 카페’(the most spectacular cafe in Asia)라 표현할 정도다.
성수이로 거리가 동맥이라면, 주변 골목길은 실핏줄과 같다. 화가와 디자이너, 사진작가들이 작업실 겸 상점으로 쓰는 곳이다. 그중 대림창고와 바이산 뒤편의 성수이로 14길에 새롭게 문 연 ‘성수연방’이란 곳도 화제다. 수제 맥줏집, 국수 가게, 고급 차, 부티크 서점 등이 한데 섞인, 이름 그대로 다채로운 ‘연방’이다. 이곳을 나와 다시 바이산 앞 사거리에서 가던 방향으로 직진하면 연무장길이다. 이 길을 가리켜 흔히 ‘부자재 거리’라 부른다. 인근 ‘성수동 수제화 거리’의 공장과 가게들에 물품을 공급하는 거리란 뜻이다. 그런데 최근 이 거리도 상당 부분 카페와 베이커리로 변하고 있다. 영화 <브룩크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 그려진 것처럼 미국 뉴욕 브루클린은 한때 가난한 변방에 속했다. 그러나 지금은 맨해튼의 능력 있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사는 곳으로 변했다. 성수동 역시 더는 변방이 아니라 혁신의 최전선이 되었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살던 이들이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부작용도 나타난다.
문득 유명 배우 대니얼 데이루이스가 떠오른다. <전망 좋은 방> <프라하의 봄> <나의 왼발> 같은 영화로 절정의 인기를 한 몸에 누리던 그가 갑자기 할리우드에서 사라졌다. 알고 보니 이탈리아 피렌체의 뒷골목 허름한 구두 공방에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지독한 가죽 냄새를 맡아가며 하루 8시간씩 허름한 의자에 앉아 가죽을 자르고 신발 밑창을 꿰매는 작업을 했다. 대중의 환호를 받는 데 익숙한 그가 묵묵히 은둔자처럼 장인의 삶을 체험하던 곳은 수제구두로 이름 높은 스테파노 베메르의 공방이었다.
그는 주변의 강권으로 5년 뒤에 스크린에 복귀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링컨>을 찍은 뒤 세 번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손에 쥐게 된다. 최다 기록이다. 지금 스테파노 베메르 공방은 견습하려는 이들로 인기다. 피렌체의 유명 관광지들이 몰린 곳이 아닌 아르노강 건너, 산 니콜로 지역의 좁은 골목길에 공방이 있다. 외경은 무척 허름하다. 그러나 그곳에서 최고의 수제화가 탄생했고 최고의 배우가 일했다. 피렌체의 자랑은 르네상스의 화려한 건축만이 아니다. 장인정신이 숨 쉬고 있는 골목길도 큰 자산이다.
반짝 아이디어와 힙한 감각, 물론 필요하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묵묵한 장인정신이다. 그것은 절대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영어로 재생을 ‘리제너레이션’(regeneration)이라 한다. 점차 죽어가던 곳에 동력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행위란 뜻이다. 골목길 재생에서 자본과 일시적으로 반짝거리는 것들만 재생시켜서는 곤란하다. 신데렐라의 화려한 구두만이 아니라 장인정신도 재생시켜야 한다.
글·사진 손관승 작가
“구두는 순우리말일까?” 나는 구두가 순수 한국어인 줄 알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아니었다. 구두는 개화기에는 서양 신발이라는 뜻의 양화(洋靴)로 불렸다. 이후 일본에서 제화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서울에 양화점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구쓰’(くつ)라는 일본말을 그대로 쓰다가 점차 구두로 변했다는 것이다. 구쓰는 신발 화(靴) 자의 일본어 발음이다.
성수역 수제화타운
성수연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