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웅할거 중원에서 상업정신이 만든 400년 전통술
이인우의 중국 바이주 기행 ⑤ 허난성 정저우시 솽차오촌 쌍교주
등록 : 2020-03-12 14:25
농촌 민중의 상업정신으로 탄생·발전
명나라부터 술 생산, 청나라 말 전성기
국유화로 쇠락 뒤 개혁개방으로 부활
올 1월에 하남지방명주의 하나로 선정
술에 불붙여 다 연소돼야 진짜 쌍교주
중국에는 고래로 “중원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得中原者得天下)라는 말이 전해져왔다. 중원은 수많은 영웅의 쟁패지였고 그만큼 정해진 주인도 따로 없었다. 그런 역사 때문일까, 중원의 하남(허난) 땅 술 시장에는 절대 강자가 없다. 구이저우의 마오타이, 쓰촨의 우량예, 산시의 분주(汾酒)와 같은 맹주가 없다. 1억 인구와 드넓은 곡창지대를 나눠 가진 중간급 영주들이 제각기 깃발을 들고 외지에서 쳐들어온 대형 회사들과 힘겹게 맞서는 형국이다. ‘하남육타금화’(河南六朶金花)라는 말은 이런 상황을 역설적으로 미화한 대명사다. 허난 술 시장에서 “6송이의 황금꽃”은 허난성 6대 명주를 가리킨다. 지난 회까지 소개한 두강주, 보풍주, 앙소주도 이 육타금화의 한자리를 차지한다.
이에 반해 이번에 소개할 주창은 육타금화에 비하면 이름과 규모 면에서 모두 ‘동네양조장급’이다. 그러나 술맛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기자는 이번 기행에서 십수 종의 바이주(白酒)를 시음할 기회를 가졌다. 이름난 술뿐 아니라 현지인이 아니면 잘 알기 어려운 지방 술도 있었다. 결론은 하나. 엄청나게 많은 중국 바이주의 우열을 이름만으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존재도 알지 못했던 ‘정주미도’(鄭州味道)가 대표적인 예이다. ‘정주미도·상선’은 원주 저장 기간이 10년 이상(8년짜리도 있다)인 52도짜리 농향형 바이주인데, 오미를 고루 간직한 짙은 맛과 향기, 유장한 풍미가 가히 일품이었다. 시음한 술 중에서 단 한 병의 바이주만 가져갈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이 정주미도를 가방에 챙겨 넣겠다.
정주미도를 생산하는 주창은 허난성의 성도 정저우(鄭州)시 후이지(惠濟)구 솽차오(雙橋·쌍교)촌이라는 농촌마을에 자리잡은 군흥쌍교주업(君興雙橋酒業)이다. 정저우 사람들은 솽차오촌에서 생산되는 술을 보통 쌍교주라고 불러왔다는데, “임금님을 기쁘게 했다”는 군흥쌍교가 오늘날의 쌍교주를 대표한다. 현재 군흥쌍교주창은 100여 명의 직원이 정주미도를 비롯한 18종의 술을 생산한다. 직원이 수만 명에 이르는 중국의 초대형 주창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규모지만, 주업(酒業)의 역사가 무려 400여 년이다. 군흥쌍교의 전통적인 양조기술은 2013년 정저우시 비물질문화유산(무형문화재)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솽차오촌은 예로부터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라고 한다. 마을 주변에 흐르는 색수하(索須河·운하) 물이 땅속으로 흘러 형성된 지하심층수 덕분이다. 주민 대부분이 농민이지만 명나라 때부터 술 생산과 판매로 명성을 얻기 시작해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중국 공산화 이후 민간 양조장들이 국유화되면서 쇠락했다가 개혁개방의 시운을 타고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현재의 군흥쌍교주창은 1990년대에 마을 주민들이 쌍교주 복원을 결의하고 2004년 주식회사 체제를 갖추면서 정저우를 대표하는 바이주로 부활했다. 주창 대표는 쌍교주 제조기술 전승자이기도 한 왕위신(王玉欣·왕옥흔) 선생. 손자까지 3대가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왕 대표는 초기 솽차오촌 술 사업을 이끌었던 왕씨 가문의 21대손이라고 한다.
“바이주를 사랑하는 한국인들이 멀리서 찾아와주니 너무 반갑고 기쁘다. 바이주의 깊은 맛과 유구한 역사를 한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주면 감사하겠다. 솽차오촌은 주류산업이 국유화되기 전까지는 마을의 거의 모든 집이 술 사업을 할 정도로 번창했다. 사회주의 경제 시절인 1970~1980년대에도 양곡배급표 2장을 줘야 쌍교주 1병을 구할 수 있을 만큼 귀했다. 마셔본 사람은 누구나 다 호평한다. 손님들도 마셔보시고 솔직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부탁드린다.” 노장인의 말에는 바이주에 대한 높은 자부심과 함께 이 기회에 쌍교주를 멀리 국외에까지 알려보겠다는 의지가 선연했다.
기자의 혀를 매료시킨 군흥쌍교의 정주미도는 지난 1월 정저우시에서 열린 허난성정부·하남주업협회가 주최한 ‘허난 명주 공포식’에서 허난 지방 명주의 하나로 선정됐다. 3회째인 이 대회에서는 바이주가 각각 허난성의 명주를 뜻하는 6종의 ‘예주명편’(豫州名片)과 지방 명주를 뜻하는 10종의 ‘예주(지방)명편’으로 뽑혔다. 허난성의 이런 이벤트에는 타지방 대형 업체들에 빼앗긴 시장을 업계의 단합과 제품 홍보를 통해 되찾아보자는 결의가 담겨 있다.
아무튼 바이주 애호가라면 가지고 있으면 좋을 ‘중원 바이주 목록’인 것은 틀림없다. 먼저 예주명편으로 뽑힌 육타금화는 낙양두강의 ‘두강1호주’, 보풍주의 ‘도단35’, 앙소주의 ‘채도방지리’를 비롯해 송하주의 ‘국자송하6호’, 사점노주의 ‘사점원청화10’, 오곡춘주의 ‘금곡*춘곡30’ 등이다.
송하주는 저우커우(周口)시 루이(鹿邑)에서 생산되는 술로서, 이 주창의 송하양액은 1989년 중국정부주류품평회에서 17대 명주로 뽑힌 대표적 명주의 하나이다. 허난성 남부 난양(南陽)시에 있는 사점주는 후한 광무제 때부터 명주로 이름난 술이며, 오곡춘주는 허난성 남동부 신양시를 근거지로 한 술로, 쓰촨성 우량예 계열의 회사이다. 10종의 예주(지방)명편은 정주미도를 필두로 백천춘동장주(수주집단·후이셴시), 황구어주존귀1988(황구주·융청시), 대한국운(장궁주·상추시), 가호·중원미도(가호주·우양현), 예파노기주·천지기(예파노주·시핑현), 영화부귀(낭릉관주·췌산현), 신양명편주(계공산주·신양시), 수양일호대사급(채홍방주·신차이현), 홍기거삼성(임주홍기거주·린저우시) 등이 있다.
정주미도는 아쉽게도 예주명편에는 들지 못했지만, 규모가 작은 회사로서 처음으로 허난성 술 시장을 향해 진군의 깃발을 올렸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정저우 사람들은 예로부터 쌍교주를 ‘정저우의 분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분주는 산시성 펀양현 싱화(杏花·행화)촌에서 나는 중국 최고 명주의 하나. “청명의 때아닌 비 부슬부슬 내리니/ 길 가는 나그네 마음도 처연하다/ 한잔 술 생각에 주막을 물어보니/ 목동이 저 멀리 행화촌을 가리킨다.” ‘살구꽃 피는 마을’이란 뜻의 싱화촌은 만당(晩唐)의 시인 두목(杜牧)이 쓴 시 ‘청명’(淸明)에 등장한 이후 ‘술 빚는 마을’의 대명사가 된 실제 지명이다. ‘정저우의 분주’라는 말은 쌍교주가 정저우의 대표 술이라는 의미가 된다.
솽차오촌에서 바이주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명나라 때다. 왕 대표에 따르면 솽차오촌에서 20~30리 떨어진 이웃 마을에서 당시 명주로 유명했던 토굴춘주 제조기술을 가진 왕굉업이란 사람이 솽차오촌으로 이주해 온 것이 왕씨 주업의 기원이다. 세월이 흐른 후 싱화촌의 한 분주 상인이 물맛 좋은 솽차오촌에 들어와 분주를 생산하자, 일단의 마을 사람들이 멀리 펀양까지 가서 분주 제조법을 배워 와 각자 자기만의 방식을 가미해 술을 만들었다. 이들이 여러 차례 실험 끝에 마침내 “분주를 능가하는” 술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 쌍교주의 창세기이다. 주방이 10여 가에 이르자 이들은 쌍교주의 품질과 신용을 지키기 위해 공동의 규약을 만들었다. 그중에는 ‘화식배간’(火熄杯干)이라는 품질 검사법도 있었다. 술을 가득 채운 잔에 불을 붙여 술을 모두 연소시킨 뒤 종이로 잔을 닦아 종이에 습기가 전혀 묻지 않을 때만 쌍교주로 공인한다는 약속이었다. 이 맹약을 지키지 못하면 반품은 물론 고객의 여비까지 물어내는 강력한 페널티를 안겼다고 한다. 신용을 생명처럼 여긴 이런 정신 덕분에 쌍교주는 청나라 건륭제 때의 명신 유통훈이 찬양의 글을 남길 정도로 명성을 쌓았고, 청나라 말기 정저우 지방을 지나가던 광서제와 서태후 일행에게 지방관이 쌍교주를 진상하면서 “중원을 대표하는 술”로 발돋움했다. 전성기 때는 주방이 100여 가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역사를 보면 쌍교주는 제례주나 전매사업 차원에서 관리되고 발전한 다른 전통 주창과 달리 농촌의 민중 생활 속에서 생업으로 탄생하고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소개했던 두강주를 귀족의 술, 보풍주를 혁명의 술, 앙소주를 과학기술의 술이라고 한다면, 쌍교주는 상인정신의 술이다. 가난한 백성이 돈을 벌기 위해 피나는 노력 끝에 자기들만의 술 제조법을 습득하고, 공동의 규약을 맺어 품질과 거래의 신용을 지켜온 역사가 그렇다. 중국에서는 평민 황제가 나온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정주미도와 같은 품질을 유지할 수 있는 한 언젠가 쌍교주가 육타금화는 물론 지존의 자리에 오르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중원을 얻는 자, 천하를 얻으리니.”
허난성 정저우시/글·사진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쌍교주의 대표 브랜드인 정주미도 상선(10년 이상 숙성)과 중용(8년 숙성). 전국적인 명성은 없지만 맛만큼은 여느 바이주에 뒤지지 않는다.
이에 반해 이번에 소개할 주창은 육타금화에 비하면 이름과 규모 면에서 모두 ‘동네양조장급’이다. 그러나 술맛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기자는 이번 기행에서 십수 종의 바이주(白酒)를 시음할 기회를 가졌다. 이름난 술뿐 아니라 현지인이 아니면 잘 알기 어려운 지방 술도 있었다. 결론은 하나. 엄청나게 많은 중국 바이주의 우열을 이름만으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존재도 알지 못했던 ‘정주미도’(鄭州味道)가 대표적인 예이다. ‘정주미도·상선’은 원주 저장 기간이 10년 이상(8년짜리도 있다)인 52도짜리 농향형 바이주인데, 오미를 고루 간직한 짙은 맛과 향기, 유장한 풍미가 가히 일품이었다. 시음한 술 중에서 단 한 병의 바이주만 가져갈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이 정주미도를 가방에 챙겨 넣겠다.
허난성 성도인 정저우시 북쪽 농촌 마을 솽차오(쌍교)촌에 있는 쌍교주창. 중국의 대형 주창에 비하면 소규모지만, 정저우시 비물질문화유산(무형문화재)으로 지정돼 있을 만큼 오랜 전통을 간직한 주창이다
쌍교주창을 찾은 ‘바이주를 사랑하는 모임’ 방문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