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들국화, 이념의 시대서 ‘개인’ 발견케 해”

첫 가사비평집 ‘이 한 줄의 가사’ 펴낸 이주엽씨

등록 : 2020-04-02 17:06
음반사 운영하며 50여편 작사가 활동

문학성 있는 노래 41곡의 가사 비평

최백호·정미조 앨범 제작, 노랫말 제공

“가사는 불러봐야 얼마나 좋은지 알아”

첫 가사 비평집 를 펴낸 음반 레이블 JNH뮤직 대표이자 작사가인 이주엽씨가 3월20일 사무실이 있는 노들섬의 한 카페에서 취재에 응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가사는 지면이 아니라 허공에서 명멸한다. 써서 읽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부르는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운명이다. 읽지 말고, 듣고 불러 봐야 안다. 그게 얼마나 좋은 가사인가를.”

음반 레이블 JNH뮤직의 이주엽(56) 대표는 최근 펴낸 저서 <이 한 줄의 가사> 머리말에서 노랫말을 이렇게 정의했다. 가사의 운명을 이렇게 절묘하게 포착하기도 쉽지 않은 듯하다.


2016년부터 2년 동안 주목할 만한 노래를 뽑아 그것에 담긴 가사의 아포리즘(경구 또는 금구)과 문학성을 분석하고, 그 노래의 시대성을 비평한 칼럼을 2주에 한 번꼴로 신문에 연재한 것을 모으고 보완해서 펴낸 이 책은 본격적인 첫 가사 비평집이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해서 “훔치고 싶고 베끼고 싶은 문장이 담긴” 노래 41편(밥 딜런과 퀸의 노래 한 곡씩 포함)에 대한 비평글이 이 책에 담겼다.

대중음악 평론가인 김작가는 얼마 전 <주간동아>에 “흔한 칼럼이 아니었다. 문학청년의 에세이이자 짧은 분량 안에 서정의 서사가 꿈틀거리는 글의 향연이었다”고 썼다.

1980년대 대표적 청춘 송가인 들국화의 ‘행진’을 다루면서 이씨는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으며/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라는 대목에 주목했다. 한국의 비틀스를 꿈꾸던 더벅머리 멤버 네 명은 앞이 보이지 않는 청춘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고 단지 앞으로 나아가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가 내리면 그 비를 맞겠다’며 불운을 기꺼이 껴안겠다는 그들의 자세에서 “절망의 바닥에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역설적으로 정신의 자유는 높이를 얻는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눈이 내리면 두 팔을 벌릴 거야’라는 도도한 외침이 불세출의 보컬 전인권의 사자후를 통해 터져 나올 때 그는 “한국 대중음악사가 도달한 가장 빛나는 한 지점”이라고 봤다.

이 노래가 담긴 들국화 1집 앨범은 ‘행진’뿐만 아니라 ‘그것만이 내 세상’ 등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켜 한 언론사에서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음반’에 선정되는 등 1980년대를 대표하는 음반이기도 하다. 이 책의 미덕은 단순한 가사 비평이 아니라 노래와 앨범이 담긴 시대성까지 포착하는 솜씨에 있다.

“들국화는 이념의 과잉과 도덕적 엄숙주의에 질식할 것 같았던 80년대에 개인을 발견케 했다. 낮에는 데모하고, 밤에는 들국화를 들었다. 우리는 들국화로 인해 자의식의 영토를 넓혔고, 그만큼 덜 교조화됐다. 들국화의 노래는 지난 시대 청춘의 광장에 펄럭인 깃발이었다.”

이씨는 3월20일 그의 사무실이 있는 노들섬에서 이뤄진 <서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언급에 대해 “80년대는 대학가에서 이런 노래를 들으면 역사의식이 없는 개인주의자라거나 자유주의자라고 매도당하는 시절이었다”며 “그런데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 같은 노래를 들으면 역사의 세계와는 다른 세상이 열리는 쾌감을 느끼곤 했다”고 말했다.

노래 한 곡 듣는 데도 시비를 걸곤 했던 80년대 운동권 문화유산에 대해 그는 지극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80년대가 가장 나쁜 것은 너그러움과 교양 받을 기회를 박탈한 것 아닐까요? 그 그늘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의 이런 시대 인식은 80년대 개인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담은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분석에서도 도드라지게 발현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라는 가사에 대해 “내면의 중층적 자아를 들여다본 이 지적이면서도 섬세한 고백은 ‘시인과 촌장’ 이전 한국 가요에는 없었다. 덕분에 한국 포크 음악은 모더니즘의 키가 훌쩍 자랐다”고 분석했다.

백설희 원곡의 ‘봄날은 간다’에서 그는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에 주목하고 “노래가 보여주는 가장 처연한 봄의 비극성이 2절 처음에 온다”고 썼다.

“이 구절에 이를 때마다 속절없이 목이 멘다. 바람에 꺾인 어리고 여린 풀잎이 물에 몸을 맡기고 흘러간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에. 새파란 죽음이라니….”

이씨는 1988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일하다 2002년 퇴사해 음반 제작사를 차렸다. 2003년 퇴직금을 다 털어넣어 재즈가수 말로의 <벚꽃 지다> 앨범 제작은 물론 작사가로도 참여했다. 최백호의 <다시 길 위에서> 앨범도 제작하고 노랫말도 제공했다. 최백호의 소개로 2016년 37년 만에 컴백한 정미조 컴백 앨범 <37년>을 제작했다. 그는 작사가로 활동하며 말로·정미조·최백호 등에게 50여 편의 가사를 제공했다.

“2002년 여름 신문사를 그만두고 집 앞 엘피(LP) 바에 가면 정미조의 ‘개여울’을 틀어달라고 했어요. 그때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원히 노래 안 할까, 노래하면 근사한 어른의 음악을 하지 않을까 오랫동안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어요. 그런데 최백호 선생이 컴백 중이던 정미조 선생을 소개한 거죠.”

“음악 안에서 삶의 한때를 허비하고 싶었다”고 책 머리에 쓸 정도로 음악적 삶을 꿈꾸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이씨는 그만큼 음악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요즘 음악은 음악 현장은 풍부해졌는데 기반은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과거 70~80년대 노래가 인생의 근원적인 것을 건드려냈다면, 요즘 노래는 말이 많아지고 코드 진행도 화려해졌죠.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공허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