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교에 서서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을 생각한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⑧ 실학파의 활동 공간 청계천
등록 : 2020-04-09 14:21 수정 : 2020-04-09 14:22
코로나 위기 속 소상공인 한숨 보면서
청계천에서 어울리던 북학파 떠올려
그날의 궁핍이 실학 정신을 낳았듯이
고통의 이 시기가 혁신의 기회라 믿어
재택근무가 길어지고 물리적 거리 두기가 장기화하면서 두 가지 물과 친구가 되었다. 새벽부터 낮 시간까지는 커피라는 이름의 검정 물, 그리고 저녁 이후에는 포도주라는 이름의 붉은색 물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이 두 친구마저 없다면 어둡고 힘든 터널 안에서 어찌 견뎌낼 수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국외에서 처음으로 포도주를 마신 조선 선비가 떠오른다. 그는 최초의 골목길 여행자이기도 하다. 18세기 초반 강희제가 통치하던 중국을 여행하던 이기지(李器之)라는 사람이 그 주인공이다. 1720년 만 서른 살의 나이에 사행단 책임자였던 아버지를 수행해 청나라를 방문하는 동안 그는 일곱 차례나 북경의 천주당을 찾아가 와인을 시음하고 카스텔라와 에그타르트 같은 빵을 체험한다. 이에 대한 답례로 서양 신부들에게 시루떡을 제공하는 등 이름만큼이나 특이한 족적을 남긴 여행자다. 그의 호 ‘일암’을 딴 저서 <일암연기>의 1720년 10월10일 기록을 읽어보자.
“서양 포도주 한 잔을 내왔는데, 색은 검붉고 맛은 매우 방열하여 상쾌하였다. 나는 원래 술을 마실 줄 모르는데 한 잔을 다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 뱃속이 편안해지면서 약간 훈훈함이 오를 뿐이었다.”
방열(芳烈)하다는 것은 향기가 매우 짙다는 뜻으로, 이 땅의 최초 와인 시음기로 기록된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연암보다 60년 먼저 북경을 방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북학파 지식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홍대용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적고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 선배 중에 노가재 김창업이나 일암 이기지 같은 분은 모두 식견이 탁월하여 후인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네. 특히 그 식견은 중국을 잘 관찰한 점에서 아주 잘 드러나지.” 이기지는 지금까지 조선시대 출장자들과 달리 남이 보지 못하던 곳을 보려 했으며 청나라 갑군의 엄격한 통제에도 북경의 골목길인 후퉁(胡同)을 누비고 다녔다. <일암연기>에는 진기한 골목길 얘기로 가득하다. 그를 가리켜 조선 최초의 골목길 여행자라 내가 말하는 이유다. 연암과 친구들에게 그는 롤모델이었으며 혁신의 씨앗을 뿌렸다. 호기심 많고 열정 충만한 이들에게 조선은 너무도 답답한 공간이었다. 훗날 연암이 열하에서 중국 사대부에게 털어놓은 속마음이 이를 말한다. “우리나라 선배들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바다 한구석을 벗어나지 못해, 마치 반딧불이 나부끼고 버섯이 한군데에서 시들어 버리듯 살았습니다.” 반딧불과 시든 버섯의 비유가 처연하게 들린다. 1772년 연암은 처자를 잠시 처가로 보낸 뒤 전의감동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는데, 지금의 종각역에서 조계사로 이어지는 동네다. 그의 집 근처에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언 등이 살았고 여기에 박제가가 이사를 오면서 자연스레 한 무리를 형성하게 된다. 남산 밑에 살던 홍대용과 정철조 등이 자주 찾아오게 되는데, 그때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을 가리켜 ‘백탑파’(白塔派)라 부른다. 박제가가 서문을 쓴 <백탑청연집>에서 연유하는 이름으로 백탑이란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3층석탑을 말한다. 이들이 집을 나와서 한잔하며 자주 어울리던 곳이 종로와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골목길이었다. 평생 술을 좋아했던 사람답게 연암은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 즉 ‘취해서 운종교를 거닐다’란 글을 남긴다. 그중에 청계천의 수표교에 도달해서 적은 글이 백미다. “들려오는 맹꽁이 울음소리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난민들이 몰려와서 소송을 벌이는 듯했다. 매미 울음소리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에 닥쳐 소리 내 글을 외우는 듯했다.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홀로 나서서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는 듯했다.” 뛰어난 능력에도 평생 재야의 선비를 자처하던 연암이 바라본 세상이다. ‘취답운종교기’의 루트를 복기해보면, 지금의 조계사 부근을 출발해 종각을 지난 뒤 광통교, 수표교에 이르는 청계천 길이다. 원래 수표교는 세종 23년인 1441년에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한 수표(水標)를 측정하기 위해 세운 곳이며 왕이 청계천을 건널 때 이용하던 대표적인 다리였다. 숙종이 이 다리를 건너다 부근의 자색이 뛰어난 아가씨를 보고 궁궐에 불러들였으니, 바로 장희빈이었다. 이 다리는 이토록 로맨틱한 이야기도 품고 있다.
수표교는 1958년 복개 공사 때 해체돼 지금은 장충단공원에 옮겨졌으며 청계천이 복원된 뒤에도 길이가 맞지 않아 지금은 원래의 석교가 아닌 나무다리로 대체돼 있다. 이 다리 옆에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던 이벽이 살던 집터가 있었다는 안내문은 있지만 조선시대 최고의 스토리텔러인 연암과 친구들의 사연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수표교 옆에는 삼일교가 있고 그 다리 양쪽으로 삼일빌딩과 원형 베를린장벽과 베를린 상징 곰이 서 있는 베를린광장이 있다. 수표교 서쪽 청계광장 쪽으로는 재개발돼 대형 건물들이 우뚝 서 있는 반면, 동쪽으로는 작고 오래된 공구상들이 몰려 있다. 전태일기념관은 그쪽에 서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생존 위기에 몰린 소상공인들이 초조하게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한다.
수표교 시절 연암도 매우 궁핍한 상태였다. 주머니의 결핍, 희망 결핍 같은 것을 말한다. 결핍은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결핍은 절실함을 낳고, 절실함은 금기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게 해준다. 앞서 홍대용, 유연, 이덕무, 박제가 등이 중국을 다녀왔고 이들로부터 큰 자극을 받은 연암에게도 1780년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다. 그는 중국 만리장성을 넘은 뒤 마침내 시대와 화해한다. 그는 ‘북학파’의 지도자가 되며 실학이라는 위대한 정신을 낳는다. 결핍이 새로운 동력을 창조하는 발전소 역할을 한 것이다.
코로나19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기이지만 반면 혁신의 기회이다. 옛것을 본받으면서 새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연암의 독창적 이론이 탄생한 곳이 바로 청계천과 골목길이었다. 이 시대에 맞는 법고창신의 정신을 찾아야 한다. 국가, 기업, 개인 모두 마찬가지다.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방열(芳烈)하다는 것은 향기가 매우 짙다는 뜻으로, 이 땅의 최초 와인 시음기로 기록된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연암보다 60년 먼저 북경을 방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북학파 지식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홍대용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적고 있을 정도다. “우리나라 선배 중에 노가재 김창업이나 일암 이기지 같은 분은 모두 식견이 탁월하여 후인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네. 특히 그 식견은 중국을 잘 관찰한 점에서 아주 잘 드러나지.” 이기지는 지금까지 조선시대 출장자들과 달리 남이 보지 못하던 곳을 보려 했으며 청나라 갑군의 엄격한 통제에도 북경의 골목길인 후퉁(胡同)을 누비고 다녔다. <일암연기>에는 진기한 골목길 얘기로 가득하다. 그를 가리켜 조선 최초의 골목길 여행자라 내가 말하는 이유다. 연암과 친구들에게 그는 롤모델이었으며 혁신의 씨앗을 뿌렸다. 호기심 많고 열정 충만한 이들에게 조선은 너무도 답답한 공간이었다. 훗날 연암이 열하에서 중국 사대부에게 털어놓은 속마음이 이를 말한다. “우리나라 선배들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바다 한구석을 벗어나지 못해, 마치 반딧불이 나부끼고 버섯이 한군데에서 시들어 버리듯 살았습니다.” 반딧불과 시든 버섯의 비유가 처연하게 들린다. 1772년 연암은 처자를 잠시 처가로 보낸 뒤 전의감동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는데, 지금의 종각역에서 조계사로 이어지는 동네다. 그의 집 근처에 이덕무,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언 등이 살았고 여기에 박제가가 이사를 오면서 자연스레 한 무리를 형성하게 된다. 남산 밑에 살던 홍대용과 정철조 등이 자주 찾아오게 되는데, 그때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을 가리켜 ‘백탑파’(白塔派)라 부른다. 박제가가 서문을 쓴 <백탑청연집>에서 연유하는 이름으로 백탑이란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3층석탑을 말한다. 이들이 집을 나와서 한잔하며 자주 어울리던 곳이 종로와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골목길이었다. 평생 술을 좋아했던 사람답게 연암은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 즉 ‘취해서 운종교를 거닐다’란 글을 남긴다. 그중에 청계천의 수표교에 도달해서 적은 글이 백미다. “들려오는 맹꽁이 울음소리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난민들이 몰려와서 소송을 벌이는 듯했다. 매미 울음소리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에 닥쳐 소리 내 글을 외우는 듯했다.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홀로 나서서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는 듯했다.” 뛰어난 능력에도 평생 재야의 선비를 자처하던 연암이 바라본 세상이다. ‘취답운종교기’의 루트를 복기해보면, 지금의 조계사 부근을 출발해 종각을 지난 뒤 광통교, 수표교에 이르는 청계천 길이다. 원래 수표교는 세종 23년인 1441년에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한 수표(水標)를 측정하기 위해 세운 곳이며 왕이 청계천을 건널 때 이용하던 대표적인 다리였다. 숙종이 이 다리를 건너다 부근의 자색이 뛰어난 아가씨를 보고 궁궐에 불러들였으니, 바로 장희빈이었다. 이 다리는 이토록 로맨틱한 이야기도 품고 있다.
장벽과 베를린 상징 곰이 서 있는 베를린광장
연암과 친구들이 놀던 수표교
청계천과 마스크 쓴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