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변 다양한 ‘나루’의 기억…역사와 현재를 잇다

장태동 여행작가, 따릉이로 한강을 여행하다 ② 동작구 노들나루공원~강동구 가래여울마을

등록 : 2020-05-28 14:38
노들나루, 흑석나루, 동재기나루 등등

푸른자전거 달리는 길에 놓인 흔적에

한양을 오고 가던 백제와 조선 사람들

반짝이는 강물 받으며 모습 되살아나

서래섬으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본 풍경.

노들나루, 흑석나루, 동재기나루, 새말나루, 삼전나루, 송파나루, 가래여울마을…. 동작구 본동 한강대교 남단 노들나루공원에서 동쪽 강동구 강일동 가래여울마을까지 이어지는 20㎞ 넘는 길을 자전거로 달리며 옛 나루의 흔적을 찾아봤다. 그 길에서 이제는 땅이 된 옛 한강의 이야기를 확인했고, 그 물가에서 번성했던 한성백제의 역사도 보았다. 가래여울마을에 도착할 무렵 노을이 피어났다. 마을 앞 강물이 노을빛에 반짝였다.

수양버들이 많아서 생긴 이름 노들나루, 구릿빛 돌이 많아 붙은 이름 동재기나루


한강대교 남단 노들나루공원에서 서울시 자전거 ‘따릉이’를 빌렸다. 노들나루공원은 조선시대에 노들나루가 있던 곳이다. 한양에서 시흥이나 수원 쪽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조선시대 정조 임금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향하던 날 한강을 건너기 위해 배다리를 놓았는데 그 남쪽 끝이 노들나루였다. 노들나루 남쪽 언덕에는 한양을 오가던 사람들이 묵었던 노량원이 있었다고 한다. 수양버들이 울창해서 노들나루라고 불렀다.

노들나루공원에서 남서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본동 440 일대는 1925년에 있었던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때 용산구 새푸리촌(현재 이촌동의 한 마을)이 물에 잠기는 바람에 그곳에 살던 60여 가구가 이주한 곳이다.

한강대교 남단 서쪽 인도 초입 한강 둔치 자전거길 나들목으로 들어간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레 내려서서 우회전, 한강을 거슬러 동쪽으로 달린다. 왼쪽에는 강물이 흐르고 오른쪽은 가파른 절벽이다. 그 절벽 꼭대기에 조선시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노한의 별서 효사정이 있다.

흑석나루는 효사정 산기슭 동쪽 흑석체육센터 인근에 있었다. 흑석나루는 조선시대 태종 임금 때 세금으로 거둔 곡물을 운반하기 위해 용산과 충북 충주 사이에 설치한 7개의 수참(곡물보관소) 중 한 곳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민간인도 많이 이용했다. 조선 후기에 수참이 폐지되고 인근에 동재기나루(동작진)가 개설되면서 사람들 발길이 끊어졌다.

동재기나루가 있던 곳을 알리는 푯돌 중 하나. 동작역과 국립현충원을 잇는 육교 부근 국립현충원 담장 앞에 있다.

올림픽대로와 깎아지른 절벽 사이 오솔길 같은 자전거길을 지나 반포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다다랐다. 반포천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지하철 4·9호선 동작역이 나온다. 동작역 2번 출구 계단 위에 동재기나루가 있던 곳을 알리는 푯돌이 있다. 동작역과 국립현충원 사이 현충로를 건너는 육교 국립현충원 담장 아래에도 동재기나루가 있던 곳을 알리는 푯돌이 있는 것으로 봐서 동작역 주변 어딘가에 나루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해본다. 동재기나루는 검붉은 구릿빛 돌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과천, 수원, 평택을 지나 호남을 오가는 사람이 많이 이용한 나루였다.

서래섬 유채꽃밭의 휴식과 오래된 뽕나무 한 그루

동작대교 남단 서쪽 강가 수양버들이 강물과 어울려 찰랑댄다. 푸른 숲 사이로 구불거리며 이어지는 자전거길을 달리는 사람들도 싱그럽다. 동작대교를 지나 반포 서래섬에 도착했다. 섬을 찾는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자전거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서 자전거를 끌고 섬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유채꽃이 노란 물결을 만드는 꽃밭 오솔길을 걷거나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는다. 꽃밭 가운데 쉼터에 모여 앉은 사람들 웃음소리가 꽃밭에 퍼진다. 무릎을 꿇고 꽃에 눈높이를 맞춘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물결’을 타고 넘듯 하얀 나비 몇 마리가 꽃밭 위에서 너울거린다.

조선시대 세종 임금 때 심었다고 알려진 잠실 뽕나무.

반포대교를 지나 신잠원나들목으로 나간 이유는 오래된 뽕나무 한 그루 때문이었다. 신잠원나들목으로 나가 도로를 만나면 왼쪽으로 돌아 인도로 걷는다. 그 길에서 ‘잠실 뽕나무’를 만났다. ‘잠실 뽕나무’는 예전에는 ‘잠실리 뽕나무’라고 했다. 이 뽕나무는 조선시대 세종 임금 때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장려할 무렵에 심은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이곳에는 왕가에서 관리하던 잠소(蠶所)가 있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잠실리였다.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에는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였다.

왔던 길로 돌아가서 다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남대교 남단 동쪽에서 ‘새말나루’가 있던 곳을 알려주는 작은 푯돌을 찾았다. 강 건너편 한강나루(한강진)에서 배를 타고 이곳 나루에 내려서 말죽거리와 판교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이용했던 나루였다. 유동인구가 많아지자 자연스레 마을이 번성했다. 일제 강점기에 새말은 신촌이 됐다. 훗날 신촌의 ‘신’과 새말 옆 사평마을의 ‘사’자를 따서 신사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한남대교부터 청담대교까지 한강의 풍경을 만끽하며 쉬지 않고 페달을 밟았다. 청담대교를 지나면 한강으로 흘러드는 탄천을 만나게 된다. 이곳부터 탄천을 거슬러 올라갔다. 자전거길은 탄천2교 다리 위로 이어진다. 다리 중간에 있는 조망대에서 탄천을 굽어본다. 모랫바닥이 보이는 시냇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모래톱, 물가의 풀과 수양버들이 어울려 여느 시골 마을 냇가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금빛 여울 아름다운 가래여울마을에서 자전거를 멈추다

잠실공원에 도착했다. 한강 자전거길을 벗어나 이곳을 찾은 이유는 옛 한강 물줄기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옛 한강 물줄기를 따라 이어졌던 한성백제의 흔적도 그곳에 남아 있었다.

잠실공원 새내 내력비 내용에 따르면 지금의 송파구 잠실동은 원래 한강 북쪽, 지금의 광진구 자양동에 붙어 있던 땅이었다. 삼면이 강에 싸인 반도의 형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그 땅에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쳤다. 그때부터 그곳을 잠실이라 불렀다. 1520년(중종 15년) 대홍수 때 거대한 물줄기가 반도 형국의 땅을 동강 내며 새 물길을 만들었다. 그 물줄기를 샛강이라고 했다.(훗날 샛강을 새내라고 불렀다.) 그 바람에 잠실은 섬이 됐다.

1970년대 들어 한강을 개발하면서 원래 한강 물줄기를 막고 샛강의 폭을 넓히는 과정을 거치며 한강은 지금의 모습이 됐다. 한강의 원래 물줄기는 사라지고 강남의 육지와 연결돼 지금의 잠실이 된 것이다. 옛날 원래 한강 물줄기의 흔적이 석촌호수다.

석촌동 고분군.

잠실공원에서 직진하면 석촌동 고분군이 나온다. 한성백제를 이끌었던 사람들의 무덤이 그곳에 있다. 돌로 쌓은 무덤도 있는데, 그중 가장 큰 돌무덤의 주인을 백제의 근초고왕이라 추정하고 있다. 갔던 길로 다시 돌아와 석촌고분역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석촌호수가 나온다. 석촌호수 서호 남서쪽 인도에 삼전나루터 푯돌, 동호 남서쪽에 송파나루터 푯돌이 있다. 한강 나루터를 알리는 두 개의 푯돌이 옛날에 이곳으로 한강 물줄기가 흘렀던 것을 알려준다.

석촌호수 건너 우회전, 삼거리에서 좌회전, 송파구청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올림픽공원(몽촌토성)이다. 몽촌호수를 오른쪽에 두고 가다가 팔각정 아래 성내천 옆을 지나 성내교로 올라서서 다리를 건넌다.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가다보면 백제 역사의 또 다른 흔적, 풍납동 토성을 만나게 된다. 토성 옆 오솔길을 따라가다가 풍성로(도로)를 만나면 좌회전한다. 그 길에 있는 풍납백제문화공원을 둘러보고 한강공원 풍납토성 나들목으로 들어가 한강 자전거길을 따라 동쪽으로 달린다.

강동구 강일동 가래여울마을은 남평 문씨 집성촌이었다. 마을 강가에 가래나무가 많고 여울이 아름답다고 해서 가래여울마을로 불렸다.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 때 마을이 유실돼 지대가 높은 지금의 자리에 마을을 이루게 됐다. 마을 뒷길은 송파장으로 가던 사람들과 우마차가 다니던 길이었다. 마을 앞 강물에서 뱃놀이하던 시절이 있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