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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주민들, 사연·노래·연주 나눠 마음의 거리 좁혀가요”

코로나발 발견 ⑤ 아파트공동체

등록 : 2020-06-11 15:31 수정 : 2021-01-22 17:37
은평구마을지원센터, 발코니 음악회 제안

단지 2곳 주민들 참여해 재능기부 공연 열고, 감사·칭찬 사연 써 응원

은평구 불광1동 북한산 힐스테이트 1차 아파트 발코니 음악회가 4월25일 오후 중앙분수광장에서 열렸다. 입주민들이 참여해 재능기부로 공연을 열고 사연을 써 서로 응원했다. 사진은 행사 전 자원봉사 주민들, 은평구마을공동체지원센터 직원 등이 베란다를 올려다보는 모습. 주혜령 은평구마을공동체지원센터 청년 활동가

“코로나 등 재난위기 때 이웃 간 신뢰가 심리면역 키워줘”

아파트, 많은 사람이 사는 생활공간

코로나19 시기에 층간소음 등 민감

“공동경험으로 소통, 공동체성 살려”

코로나19가 길어지면서 위기 극복을 위한 마을 공동의 활동을 이어가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마스크 만들기에 이어 아파트 발코니 음악회 열기를 제안한 은평구마을공동체지원센터의 노력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춘희 은평구마을공동체지원센터장은 지난 3월 이탈리아의 발코니 음악회 뉴스를 보고 ‘우리도 한번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전문 음악가들의 찾아가는 공연보다는 주민들이 직접 준비하고 참여하는 음악회를 머릿속에 그렸다. 이 센터장은 “공연과 행사를 공동으로 하는 과정에서 코로나로 지친 마음을 서로 다독거리며 공동체성도 강해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고 한다.

첫 번째 제안 대상은 불광1동 북한산 힐스테이트 1차 아파트(603가구)였다. 이 아파트는 2008년 입주 뒤 하자 소송, 동 대표 간 마찰 등으로 은평구청이 나서 선거관리위원회를 꾸려야 할 정도로 갈등이 심각했다. 지금은 입주 초기 갈등을 딛고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2015년 아파트의 작은도서관 ‘솔숲문고’ 활동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모여 갈등을 풀어갔다. 주민 자생단체의 동아리 활동도 하나둘 생겨났다. 카톡 주민 단체대화방에 300여 명이 모였다. 2016년엔 서울시의 아파트 공동체 활성화 사업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대부분의 활동이 중단되고 엘리베이터에서도 마스크를 써 인사 나누기가 어려워져 주민들 간 마음의 거리가 멀어지는 분위기였다. 손윤호 입주자대표회장은 “코로나 위기가 계속되면서 이웃 간 마음의 거리는 좀 좁혔으면 하는 바람으로 입주자대표회의 6명이 반대 없이 음악회를 여는 거로 결정했다”고 했다. 방역 수칙을 지키며 주민들끼리 서로 믿고 해보자고 일을 벌였지만,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손 회장은 “호기롭게 우리가 주관하기로 나섰지만 정작 주민들이 나서줄까 걱정돼 며칠은 밤잠을 못 잤다”고 웃으며 말했다.

주민 자생단체, 입주자대표회의, 관리사무소 세 주체가 손발을 맞췄다. 현재 주민 120여 명이 있는 카톡 단체대화방에서 음악회와 ‘봄꽃과 사연 나누기’ 행사를 알렸다. 나눔 행사는 은평구마을공동체지원센터가 때마침 서울시가 펼친 전남 강진 화훼농가 돕기 이벤트를 연계해줬다. 평소 미안하거나 고마운 사연을 담은 엽서와 함께 신청자가 이웃에게 직접 꽃을 전하기로 했다.

지난 4년 동안 활동을 이어온 주민 자생단체의 저력이 힘을 발휘했다. 노래 교실 참여자들이 모두 신청에 나서 네 팀으로 추려야 할 정도였다. 사연은 구글 문서와 전자우편으로 30여 편 들어왔다. 7년 동안 총무를 맡아왔던 주민 정재은씨는 “공동체 활동으로 쌓였던 경험이 어려운 시기를 맞아 긍정의 힘으로 드러난 것 같다”고 했다.

초등생부터 80대 어르신이 참가해 플롯, 첼로, 피아노, 색소폰을 연주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자원봉사로 참여한 초·중생 예닐곱 명은 솔숲문고에 모여 포스터를 만들었다. ‘집에서 안전하게 즐겨요’ ‘몸은 멀리, 마음은 함께’ ‘좋은 호응이 만드는 음악회’ 등 20여 장을 꼬박 반나절 걸려 그려냈다. 아이들은 힘들어하기보다 코로나19로 만나지 못했던 동네 친구, 언니, 동생들과 장난도 치며 즐거워했다.

열흘가량의 준비를 거쳐 북한산 힐스테이트 아파트 베란다 음악회는 4월25일 토요일 오후 아파트 중앙분수광장에서 열렸다. 바람이 불고 제법 쌀쌀했다. 그래도 베란다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팔을 흔들고 손뼉을 치는 주민이 여럿 있었다. 공연을 시작한 지 30여 분 지나자 마스크를 쓰고 광장으로 나오는 주민이 하나둘씩 늘었다. 자연스레 광장 음악회로 바뀌었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음악의 리듬에 따라 몸을 살짝 흔들며 즐기는 모습도 여기저기서 보였다.

대학생 버스킹팀으로 참여한 주민 송용윤·구민재씨는 “이웃에게 위안을 주면 좋을 것 같아 나왔는데 노래를 부르면서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며 코로나19 극복을 응원했다. 귀에 익은 <환희의 송가> 첼로 연주엔 박수 소리가 커졌다. 80대 어르신의 열창에 뭉클해하며 눈시울을 적시는 주민도 있었다. 공연 시작과 끝에는 은평구마을공동체지원센터의 지원으로 전문가의 기타 연주와 팝페라 공연이 곁들여져 즐거움을 더했다. 센터 직원들은 이번 행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연 중간마다 주민들 사연이 소개됐다. 세 남매를 키우며 직장을 다니는 한 주민은 초등생 막내의 친구 엄마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온라인 수업을 챙겨주고 수시로 아이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영상도 보내줘 걱정 없이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며 고마워했다.


층간소음으로 아래층 이웃에 죄송한 마음, 마스크 구하기 어려울 때 마스크를 선뜻 나눠주거나 외국에서 온 자녀가 자가격리 중일 때 빵을 문 앞에 두고 간 이웃에 감사한 마음, 아파트 화단을 살뜰히 가꿔주는 어르신을 칭찬하는 마음 등 사연엔 다양한 마음이 담겼다. 코로나19 시기에 동네 사람들이 함께 적은 기록이 됐다. 이 사연들은 행사가 끝난 뒤 대형 펼침막으로 만들어져 단지에 한동안 걸렸다. 입주민들이 오가며 훈훈한 이야기에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음악회가 끝난 뒤 주민들 반응은 뜨거웠다. “감동적이었고, 사회적 거리 두기 속 서로의 마음도 알고 공감하는 기회였다” “아파트에서 상상할 수 없는 문화다. 이웃들이 좋아서 감동이고 따뜻함을 느꼈다” “덕분에 힘을 얻었다” 등의 소감이 잇따랐다. 단톡방에도 30여 개의 소감과 이모티콘이 올라왔다. 정재은씨는 “아파트 공동체의 중요성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처음 해보는 거라 어려움이 많았는데 주민들이 함께해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입주자대표회의도 자신감이 생겼다. 손 회장은 “코로나19로 힘들지만 얻은 것도 있다”며 “이웃과 소통의 소중함도 알고, 입주민들이 칭찬해주고 믿어줘 뿌듯하다”고 했다. 가을쯤 이웃 아파트 단지들과 함께 행사를 열어볼 계획도 덧붙였다. 집값 문제로 경쟁적이었던 이웃 아파트 단지들과의 관계도 코로나19로 변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그전엔 뭐든 경쟁적으로 했는데 코로나로 모두가 힘드니까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며 “방역 수칙을 지키면서 서로 소통해 마음의 거리를 좁혀가야 한다”고 말했다.

5월16일 오후 은평구 진관동 뉴타운 12차 단지의 발코니 음악회에서 한 주민이 베란다 창문을 열고 공연을 즐기고 있다. 은평구 제공

두 번째 아파트 발코니 음악회는 5월16일 토요일 오후 진관동 은평뉴타운에서 열렸다. 12차 단지 공동주택 활성화단체 ‘나눔공동체’가 주관하고 입주자대표회의, 관리사무소가 함께했다. 단지 놀이터에서 열린 음악회에는 주민 8팀이 가야금, 해금, 클라리넷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 공연 중간에 7편의 사연 소개도 곁들였다. 주민들이 낸 사연 총 23편 가운데 층간소음 문제에 대한 죄송함과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사연이 많았다. 강북구의 경비원 자살 사건의 영향인지 경비원에게 보내는 감사 인사도 3편 있었다.

임은탁 나눔공동체 회장은 “뜻을 같이하고 시간을 내 기꺼이 나서준 주민들이 있어 서로 큰 힘이 됐다”고 했다. 꼼꼼하게 방역 수칙을 잘 지켜 진행해, 우려했던 어르신들도 공연 뒤 좋았다고 말해줬다. 임 회장은 촉박한 일정으로 더 많은 주민의 참여를 끌어내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며 “향후엔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홍보 등을 차근차근 준비해 진행하려 한다”고 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아파트의 공동체성이 다시 관심을 끈다. 아파트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2000년대부터 있었지만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서울시도 2010년대 중반부터 공동주택 커뮤니티 활성화 사업을 추진하며 아파트 단지에서 공동체를 활성화하려는 노력을 이어오고 있다. 일련의 성과가 있지만, 확산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처럼 아파트 단지가 지닌 집단적 생활 조건에서 공동체 형성의 싹을 찾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쉽지 않았다. 이웃과의 교류 없이도 살 수 있는 아파트의 공간적 특징은 단지 전체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런데도 변함없는 사실은 아파트가 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춘희 은평구마을공동체지원센터장은 “코로나19 같은 재난 위기 때 이웃에게 느끼는 신뢰가 삶의 질에 큰 영향을 준다”고 했다. “공동의 경험으로 소통하며 심리면역을 키워주는 아파트 공동체성이 드러날 수 있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 센터장은 “마을 공동의 실천 경험이 쌓여가면 갈등과 위기 대처 능력이 향상되고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힘줘 말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