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위에서 ‘사라진 한강 섬’ 저자도를 생각하다
장태동 여행작가, 따릉이로 한강을 여행하다 ④ 용산구 한강대교 북단~광진구 광나루 터
등록 : 2020-06-25 14:10
중랑천-한강이 만나는 곳에 있었던 섬
조선 때 ‘한강 최고 풍경’ 연출했다지만
흙 퍼내 70년대 압구정동 조성에 사용
흐르는 물에 역사도 흐른다 새삼 느껴
한강대교 북단 동쪽 인도에서 보는 숲과 강물 사이에 난 자전거길은 그야말로 푸른 자전거가 가는 길이다. 미루나무 흙길에서 떠오른 추억에 여름 한낮 폭염도 녹록하다. 조선시대 얼음 창고인 서빙고와 동빙고의 이야기, 두뭇개와 입석포 그리고 사라진 섬 저자도가 어울린 조선시대 한강 최고의 풍경인 동호 이야기, 임금과 왕실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한강가 들판과 정자, 나루터를 지나 마지막으로 돌부처 앞에 선다. 천년 세월 광나루를 오가는 백성의 안녕을 빌어주던 그 기원이 지금도 유효했으면 좋겠다.
서빙고와 동빙고
한강대교 북단 동쪽 인도에서 푸른 숲과 강물 사이로 곧게 뻗은 한강 둔치 자전거길을 굽어본다. 오늘 가야 할 길의 출발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강 둔치로 내려가 동쪽으로 달린다. 미루나무 흙길은 추억으로 들어가는 통로다. 1970년대 시골 마을 신작로와 가로수가 그랬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 땡볕 아래 미루나무 그림자가 송곳처럼 박힌 그 길에서 질경이처럼 자라던 유년이 있었다. 추억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길목은 한강 둔치 서빙고 나들목이었다. 서빙고 나들목으로 나가서 삼거리를 만나면 좌회전한 뒤 조금 가다가 우회전, 그리고 철길을 건너는 육교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조금 가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서빙고역이 있는 동쪽으로 달린다. 서빙고역에서 대각선 방향 편의점이 있는 건물 오른쪽 인도에 조선시대에 서빙고가 있던 터를 알리는 푯돌이 보인다. 서빙고는 조선시대 얼음 창고다. 움막 형태로 지어진 창고가 8채였다. 이곳의 얼음은 궁중이나 벼슬아치들이 사용했다. 푯돌을 뒤로하고 서빙고역 쪽으로 길을 건너 동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한강 둔치로 내려가는 도로가 나온다. 철길 건널목을 건너야 한강 둔치로 갈 수 있다.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에 몇 대의 전철을 보내고 나서야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한강 둔치 한남 나들목으로 나가면 도로 가운데 ‘정겨운 마을 마당’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원이 있다. 그곳 화단 키 작은 나무에 묻힌 한강진 나루터 푯돌을 찾았다. 한강진은 강 건너편 사평나루와 연결되며 경기도 용인, 충북 충주 등지로 오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다시 한강 둔치로 돌아와 페달을 밟는다. 한강 둔치 옥수 나들목으로 나가서 옥수역 1번 출구를 지나 옥수 현대아파트 정문 앞에서 자전거를 멈춘다. 정문 안 왼쪽에 푯돌 두 개가 보인다. 하나는 조선시대에 종묘와 사직에 제를 올릴 때 사용하던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인 동빙고가 있던 곳을 알려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얼음을 저장할 때와 꺼낼 때, 춥지 않아 얼음이 얼지 않을 때 제사를 지냈던 사한단 터를 알리는 것이다.
1701년 겨울은 따듯했나보다. 12월 중순을 지날 때도 날씨가 더워서 얼음이 얼지 않아 조정에서 논의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얼음을 얻기 위해 그해 12월에도 사한제를 지냈다.
두뭇개, 입석포, 저자도가 만든 조선시대 최고의 한강 풍경 옥수역 5번 출구 앞 도로 건너편 두뭇개 나루터 공원에 조선시대 두뭇개 나루터(두모포) 자리를 알리는 푯돌이 있다. 이 동네에서 40여 년 살고 있다는 아저씨 말로는 나루터는 푯돌이 있는 곳이 아니고 남쪽으로 더 내려간 곳에 있었다고 한다. 두 물이 만난다고 해서 ‘두물개’ 또는 ‘두뭇개’라고 불렀다. 지금의 옥수동, 중랑천과 한강 합수 지점 일대를 이른다. 1395년 조선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은 수릉(壽陵,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무덤)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지금의 과천 지역을 살폈다. 돌아오는 길에 한강을 건너 도착한 곳이 두뭇개 나루였다.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다른 신료들은 두뭇개 나루 선상에서 술잔을 나누었다. 정도전은 이성계 앞에서 눈물을 보였고 이성계는 편안한 날에 미리 수릉 자리를 알아보는 것일 뿐이라고 정도전을 위로했다. 세종 임금은 대마도 정벌을 위해 출정하는 이종무 장군과 군사들을 두뭇개 나루에서 배웅했다. 연산군은 두뭇개와 그 앞 한강 가운데 있었던 저자도 등을 돌며 놀았다. 한강공원 옥수 나들목으로 돌아와 동쪽으로 달린다.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 멀지 않다. 두 물이 만나는 곳에 생긴 삼각주가 지금은 사라진 섬, 저자도였다. 그 섬에는 구릉과 연못, 모래밭이 있었다고 한다. 중랑천 건너편에는 입석포라는 나루가 있었다. 두모포와 저자도, 입석포가 어울린 풍경이 조선시대 한강 최고의 풍경이었다고 한다. 한강도 흐르는 위치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이곳을 지나는 한강을 동호라고 불렀다. 예종과 성종 임금의 장인 한명회가 한강 남쪽 기슭에 압구정을 지은 이유도 두뭇개와 입석포, 저자도가 만드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세종 임금은 저자도를 정의공주에게 하사했으며, 공주는 작은아들인 안빈세에게 그 섬을 물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섬의 상당 부분이 유실됐고, 1970년 정부의 허가를 받은 현대건설이 저자도의 흙과 모래를 퍼서 압구정동에 택지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동호의 아름다운 풍경의 한 축이었던 저자도는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게 됐다.
광나루 터에서 만난 불상, 뱃길의 안녕을 빌던 상부암 석불입상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서 잠시 한강을 벗어나 중랑천을 거슬러 올랐던 이유는 살곶이 다리 때문이었다. 세종 2년(1420년) 공사를 시작해서 성종 14년(1483년) 완공된 살곶이 다리를 지금도 사람들이 밟고 건넌다. 한강의 지형을 바꾼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에도 다리 일부만 훼손됐을 뿐이었다. 1970년대에 훼손된 다리를 보수했다.
살곶이 다리가 있던 곳이 살고지들인데 들판 넓이가 동서 7리(약 2.7㎞), 남북 15리(약 5.8㎞)나 됐다. 이곳은 왕실의 매 사냥터이자 말을 놓아먹이는 곳이었으며, 군대의 훈련장이기도 했다. 살고지들은 지금의 뚝섬 일대였지만 그보다 더 넓었다.
살곶이 다리를 보고 다시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으로 돌아와서 다리를 건너 동쪽으로 향한다. 영동대교 밑을 지나면서 왼쪽을 보면 뚝섬 나루가 있던 곳을 알리는 비석이 보인다. 1972년 법정 스님이 대장경 번역 작업을 위해 봉은사로 가는 길에 한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탔는데, 당시를 회고하는 글이 안내판에 적혀 있다. ‘승용차와 소가 끄는 수레, 분뇨를 실은 트럭, 그 바퀴 아래 신사와 숙녀들도 함께 태웠다’는 내용이다. 뚝섬 나루는 강 건너 송파와 청숫골을 잇던 나루터였다. 청숫골은 지금 청담동의 한 동네인데, 그 동네 물이 맑아 청숫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청담동은 청숫골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강공원 낙천정 나들목으로 나가 우회전해서 조금 가면 낙천정이 있다. 낙천정은 태종 임금이 세종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말년에 자주 드나들던 곳이다. 정자도 있었지만 아예 별궁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낙천정이 있는 자리는 옛 그 자리가 아니며, 정자 또한 옛 정자와 별개의 것이라고 밝혀져서 문화재 지정도 취소됐다고 한다. 옛 낙천정 건물도 터도 아니었지만 태종과 세종 임금이 낙천정에서 대마도 정벌을 논의했다던 그날의 삼엄함을 상상하며 한강으로 돌아와 도착 지점인 광나루 터로 향한다.
광진교에서 500m 정도 거리에 광진정보도서관이 있다. 자전거길을 벗어나 도서관 쪽으로 올라간다. 오르막길에 다 올라서서 왼쪽을 보면 광나루 터 푯돌이 있다.
1410년 태종 임금은 조선의 두 번째 임금 정종이 건원릉에서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 광나루에 나가 영접하고 잔치를 벌였다. 세종 임금은 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함께 마전포(삼전도)에서 배를 타고 광나루에 도착한 뒤, 광나루 들판에서 매사냥을 구경하기도 했다.
광진정보도서관 부근에 있는 따릉이 거치대에 자전거를 반납하고, 마지막으로 들러야 할 곳, 상부암 석불입상을 찾았다. 이 불상은 670년에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머리가 크고 불상에 표현된 옷의 형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불확실한 불상의 유래보다는 광나루 부근에 세워져서 오랫동안 광나루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한 그 뜻을 높이 사는 게 좋겠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
서빙고와 동빙고
한강대교 북단 동쪽 인도에서 푸른 숲과 강물 사이로 곧게 뻗은 한강 둔치 자전거길을 굽어본다. 오늘 가야 할 길의 출발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강 둔치로 내려가 동쪽으로 달린다. 미루나무 흙길은 추억으로 들어가는 통로다. 1970년대 시골 마을 신작로와 가로수가 그랬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 땡볕 아래 미루나무 그림자가 송곳처럼 박힌 그 길에서 질경이처럼 자라던 유년이 있었다. 추억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길목은 한강 둔치 서빙고 나들목이었다. 서빙고 나들목으로 나가서 삼거리를 만나면 좌회전한 뒤 조금 가다가 우회전, 그리고 철길을 건너는 육교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조금 가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다. 서빙고역이 있는 동쪽으로 달린다. 서빙고역에서 대각선 방향 편의점이 있는 건물 오른쪽 인도에 조선시대에 서빙고가 있던 터를 알리는 푯돌이 보인다. 서빙고는 조선시대 얼음 창고다. 움막 형태로 지어진 창고가 8채였다. 이곳의 얼음은 궁중이나 벼슬아치들이 사용했다. 푯돌을 뒤로하고 서빙고역 쪽으로 길을 건너 동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한강 둔치로 내려가는 도로가 나온다. 철길 건널목을 건너야 한강 둔치로 갈 수 있다.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에 몇 대의 전철을 보내고 나서야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한강 둔치 한남 나들목으로 나가면 도로 가운데 ‘정겨운 마을 마당’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원이 있다. 그곳 화단 키 작은 나무에 묻힌 한강진 나루터 푯돌을 찾았다. 한강진은 강 건너편 사평나루와 연결되며 경기도 용인, 충북 충주 등지로 오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동빙고 터와 사한단 터 푯돌.
두뭇개, 입석포, 저자도가 만든 조선시대 최고의 한강 풍경 옥수역 5번 출구 앞 도로 건너편 두뭇개 나루터 공원에 조선시대 두뭇개 나루터(두모포) 자리를 알리는 푯돌이 있다. 이 동네에서 40여 년 살고 있다는 아저씨 말로는 나루터는 푯돌이 있는 곳이 아니고 남쪽으로 더 내려간 곳에 있었다고 한다. 두 물이 만난다고 해서 ‘두물개’ 또는 ‘두뭇개’라고 불렀다. 지금의 옥수동, 중랑천과 한강 합수 지점 일대를 이른다. 1395년 조선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은 수릉(壽陵, 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임금의 무덤)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지금의 과천 지역을 살폈다. 돌아오는 길에 한강을 건너 도착한 곳이 두뭇개 나루였다.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다른 신료들은 두뭇개 나루 선상에서 술잔을 나누었다. 정도전은 이성계 앞에서 눈물을 보였고 이성계는 편안한 날에 미리 수릉 자리를 알아보는 것일 뿐이라고 정도전을 위로했다. 세종 임금은 대마도 정벌을 위해 출정하는 이종무 장군과 군사들을 두뭇개 나루에서 배웅했다. 연산군은 두뭇개와 그 앞 한강 가운데 있었던 저자도 등을 돌며 놀았다. 한강공원 옥수 나들목으로 돌아와 동쪽으로 달린다.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이 멀지 않다. 두 물이 만나는 곳에 생긴 삼각주가 지금은 사라진 섬, 저자도였다. 그 섬에는 구릉과 연못, 모래밭이 있었다고 한다. 중랑천 건너편에는 입석포라는 나루가 있었다. 두모포와 저자도, 입석포가 어울린 풍경이 조선시대 한강 최고의 풍경이었다고 한다. 한강도 흐르는 위치에 따라 이름이 다른데, 이곳을 지나는 한강을 동호라고 불렀다. 예종과 성종 임금의 장인 한명회가 한강 남쪽 기슭에 압구정을 지은 이유도 두뭇개와 입석포, 저자도가 만드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세종 임금은 저자도를 정의공주에게 하사했으며, 공주는 작은아들인 안빈세에게 그 섬을 물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섬의 상당 부분이 유실됐고, 1970년 정부의 허가를 받은 현대건설이 저자도의 흙과 모래를 퍼서 압구정동에 택지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동호의 아름다운 풍경의 한 축이었던 저자도는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게 됐다.
광나루 터에서 만난 불상, 뱃길의 안녕을 빌던 상부암 석불입상
살곶이 다리.
광나루 부근에서 천년 동안 배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했던 상부암 석불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