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중림동 3천원 식사엔 ‘삶의 치열함’ 담겨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⑭ 옛 정서 공감의 거리 중림동
등록 : 2020-07-02 15:50 수정 : 2020-07-02 16:57
한국의 최초 기록 많은 독특한 지역
70년대 가장 붐볐던 중림 어시장의
새벽 3시 펄떡펄떡이던 생선을 보며
힘들 때 위로받던 그 기억 새록새록
이제 이조식당 3천원짜리 국수 앞에선 ‘삶이 힘들다’는 투덜거림 숨을 곳 없다
하나의 길이 막히면 또 다른 길이 열리는 법이다. 7월이 시작되도록 먼 하늘길이 여전히 자유롭지 않게 되자 나는 시선을 주변으로 돌리기로 했다. 로컬에 대한 재발견이다. 때마침 긴급재난기금 도입으로 가까운 곳에서 맛집을 찾고, 의미 있는 공간을 소비하려는 움직임도 늘었다. 여행이 그런 것처럼 골목길 걷기도 유혹이란 요소가 중요하다. 새로운 맛집, 눈길을 끄는 디자인과 인테리어, 감동적 스토리텔링, 특정 작가나 예술가의 자취 같은 것을 말한다. 이번에는 중림동의 골목길을 걷기로 했다. 왜 중림동인가? 설명하기 힘든 어떤 정서적인 유대감과 공감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문지리학자 이 푸 투안이 말하는 토포필리아, 특정 장소가 주는 편안함 같은 것을 말한다. 중림동은 한국 최초의 기록을 많이 보유한 지역이기도 하다.
지하철 충정로역 4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향하는 골목이 서소문로6길, 중림동 보건소와 데이케어센터로 향하는 길이다. 건물을 끼고 왼쪽으로 걸으면 비좁은 골목길 언덕에 홀로 서 있는 작은 아파트가 보인다. 1970년 국내 최초의 복도식 주상복합 아파트로 세워진 성요셉아파트,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무대가 됐던 유서 깊은 장소다. 도시 빈민들 지역에 아파트 개발과 입주권을 둘러싼 갈등을 그린 70년대 화제작인데, 현재는 1개 동에 68가구가 산다. 1층에는 옛 방식으로 참기름을 짜서 파는 곳과 떡방앗간, 그리고 ‘커피 방앗간’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반세기 전 서울의 풍경과 맛이 고스란히 살아 있으며 가격도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하다.
성요셉아파트 건너편으로는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이 전시와 판매, 문화 활동을 하는 복합공간 ‘중림창고’가 생겼다. 낙후한 지역의 거점 역할을 하기 위한 ‘앵커시설’이자 도시재생 사업으로 기대를 받았지만, 코로나19 사태 때문인지 아직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골목길을 조금 더 내려가 청파로를 만나는 왼쪽에 허름한 건물이 있는데 ‘새벽시장’이라 부르는 중림 어시장이다. 70년대 이전만 해도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수산물 시장이었다. 노량진 수산시장 등에 밀려 지금은 매우 축소됐지만, 여전히 새벽 3시부터 생선을 실어나르는 차량과 오토바이들로 붐빈다. 젊은 시절 나는 힘들 때면 이곳에 와서 펄떡펄떡 꿈틀거리는 생선과 상인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 동력으로 또 얼마간을 버티곤 했다. 새벽 3시는 괴테가 새로운 인생에 도전장을 내민 시간이기도 하다.
청파로에서 길을 건너면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과 서소문역사공원이 있다. 조선시대 민란을 일으킨 자와 병인박해, 신유박해 등 천주교 박해로 많은 사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곳이다. 숙연한 마음으로 공원을 산책하다 길을 건너면 염천교 수제화 거리다. 한국 최초의 수제화 거리로 1925년 일제 강점기에 서울역 인근에 피혁창고가 생기면서 구두 상인들이 모여들어 탄생했으니 거의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1980년대의 황금기를 지나 지금은 서른 곳 미만의 상점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댄스화’ ‘무도화’ 전문이라는 글씨를 구경하며 지나가는데, 힘든 시절 구두 하나 사달라는 상점 주인의 말에 그만 마음이 약해져 캐주얼화 한 켤레를 사고 말았다. 크게 깎아줬다고 하는데 그의 표정으로 볼 때 아무래도 내가 흥정에서 진 것 같다.
다시 중림동 방향으로 돌아가 언덕으로 향한다. 서울에는 230여 개에 이르는 고개가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 서울은 고개의 도시이기도 하다. 진고개, 당고개, 만리재, 아현, 남태령이라는 말처럼, 고개는 재, 현, 치, 령 등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이곳 중림동에는 약현성당이 우뚝 서 있다. 약현(藥峴)은 한자가 뜻하는 것처럼 조선시대 약초를 기르던 밭이 많아서 붙여진 고개 이름인데, 1893년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신부에 의해 한국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성당 건물이다. 서양인에게 최초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의 집이 부근에 있었으며 근처에서 많은 순교자를 낸 장소를 굽어보는 언덕에 지어졌고, 성요셉 성당으로도 불린다. 로마네스크 양식이 주축이 된 벽돌식 성당 건물과 주변 정원은 신도가 아니더라도 직장인들의 산책 코스로도 애용된다. 멀리 남산과 서울 시내가 보이는 풍경을 잠시 즐기기에도 그만이다.
약현성당을 내려와 오른쪽으로 향하면 ‘서울로7017’, 미국 뉴욕의 하이라인을 벤치마킹한 것으로 서울역 일대의 고가도로를 차량이 다니던 길에서 사람의 길로 바꾼 도시재생 프로젝트다. 중림동이 주목받게 된 것도 이 서울로의 영향이 크다. 서울로에 올라서면 곳곳에 매우 큰 화분들이 지그재그 들어서 있어 걷는 데 장애가 된다는 평도 많지만, 반면에 인근 직장인들이 그곳에 숨어 몰래 눈물을 흘리는 애환의 장소이기도 하다.
서울로에서 내려와 중림로 언덕으로 향하기 직전 실로암 사우나가 보이는 골목인 청파로 103길로 들어선다. 3천원짜리 콩나물비빔밥과 잔치국수로 유명한 ‘이조식당’에 들러 늦은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3시, 헤밍웨이가 가난한 파리의 무명작가 시절 영어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들렀다가 서점 주인 실비아에게 점심을 굶고 다니는 사실을 들켰던 바로 그 시간이다. 갈증과 배고픔, 지적 갈구와 서러움이 혼합돼 헤밍웨이는 훗날 “배고픔은 훌륭한 가르침이다”라는 명문을 남기기에 이른다. 스티브 잡스의 ‘스테이 헝그리’(배고픈 정신을 유지하자) 연설은 너무도 유명하지만 사실 그 뿌리는 헤밍웨이의 오후 3시의 허기였다. 육체적 공복감은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위대한 창작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것을 두 사람은 보여준다. 식당 안을 둘러보니 3천원이란 밥값이 말해주듯 삶의 치열함이 묻어난다. 감히 사는 것이 힘들다고 투덜거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이제 이조식당 3천원짜리 국수 앞에선 ‘삶이 힘들다’는 투덜거림 숨을 곳 없다
하나의 길이 막히면 또 다른 길이 열리는 법이다. 7월이 시작되도록 먼 하늘길이 여전히 자유롭지 않게 되자 나는 시선을 주변으로 돌리기로 했다. 로컬에 대한 재발견이다. 때마침 긴급재난기금 도입으로 가까운 곳에서 맛집을 찾고, 의미 있는 공간을 소비하려는 움직임도 늘었다. 여행이 그런 것처럼 골목길 걷기도 유혹이란 요소가 중요하다. 새로운 맛집, 눈길을 끄는 디자인과 인테리어, 감동적 스토리텔링, 특정 작가나 예술가의 자취 같은 것을 말한다. 이번에는 중림동의 골목길을 걷기로 했다. 왜 중림동인가? 설명하기 힘든 어떤 정서적인 유대감과 공감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문지리학자 이 푸 투안이 말하는 토포필리아, 특정 장소가 주는 편안함 같은 것을 말한다. 중림동은 한국 최초의 기록을 많이 보유한 지역이기도 하다.
성요셉아파트
염천교 수제화거리
국내 최초 서양식 성당 건물 약현성당
중림창 고의 서점 기념품 판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