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세실레스토랑’ 앞에서 역사의 함성을 듣다

손관승의 공감재생 골목여행 ⑮ 시청역~세실극장~정동

등록 : 2020-07-16 15:13
성공회 4대 주교 세실 쿠퍼 이름 딴 곳

6월항쟁 기폭제 된 뒤 2008년 문 닫아

언론인으로서 취재했던 그 순간 ‘생생’

1890년에 초석 세웠던 영국대사관 등

정동길 곳곳, 100년 넘은 옛 건물 산적


세상에는 ‘하이퍼그라피아’라 부르는 중증의 글쓰기 중독증 환자들이 있다고 하지만, 글 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그런 경지에 나는 어림도 없다. 오히려 영어권에서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이라 부르는, 쓰고 싶은데 글이 잘 써지지 않는 현상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미국 뉴욕에서 발간되는 <뉴요커> 과월호를 뒤지다가 흥미로운 제목 앞에 눈이 멈췄다.


‘왜 걷기는 우리의 사고능력에 도움을 주는가?’

산책을 위해 걸으면 심장이 더 빠르게 펌프질하고 근육뿐 아니라 모든 장기에 많은 혈액과 산소를 순환시켜주며, 그 장기 가운데 당연히 뇌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걷기라는 행위를 할 때 뇌는 주변 세상을 체계화하며, 글을 쓸 때 뇌는 생각을 체계화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걷기와 생각하기 그리고 글쓰기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결론이었다. 다시 쓰기 위해서는 걸어야 한다.

나는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 뒤 지하철 시청역에서 내렸다. 4번 출구 광화문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면 우측에 프레스센터가 있는데,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에서 내렸다. 프레스클럽과 연회장이 있는 층이지만 나의 오늘 목적지는 남자 화장실이다. 화장실 창문 바깥으로 사진 한 장 찍기 위해서다. 덕수궁의 시원한 녹지와 그 옆으로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성공회 대성당, 서울시의회 건물, 시청에서부터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프레스센터에서 본 덕수궁·세실극장·성공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조심스레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사진 몇 장 서둘러 찍고 내려와 건널목을 건너 덕수궁 돌담을 끼고 있는 세종대로19길로 향한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세실극장, 그리고 영국대사관이 차례로 기다리는 골목이다. 세실극장은 1970년대와 80년대 소극장 운동의 메카였고, 세실레스토랑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곳이며 단골 기자회견 장소였다. 나는 언론인으로서 그 숨 막히는 역사적 현장을 지켜보았다. 정동역사재생지역협의체가 발간한 <정동 이야기>라는 책자에 따르면, 세실은 이 땅에 왔던 대한성공회 4대 주교인 세실 쿠퍼의 이름에서 연유했다. 세실 주교는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가 해방 뒤 다시 돌아왔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북한군에 납치됐다. 전쟁포로 송환 때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풀려나 영국 런던을 거쳐 서울에 다시 돌아왔다. 이처럼 그 이름 속에는 격동의 시대가 모두 녹아들어 있지만, 세실레스토랑은 2008년 문을 닫았다. 지금은 회의를 겸할 수 있는 식당 ‘달개비’로 이름이 바뀌었다.

골목길 안쪽의 영국대사관이 건물 초석을 세운 것은 1890년, 이 동네의 서양 터줏대감이나 마찬가지다. 100년의 세월이 지나 건물이 낡자 1992년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세자비가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거행하고 지금의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된다. 골목길을 돌아 나와 입구의 지상 주차장 옆으로 들어가면 로마네스크 양식에 빛나는 성공회 서울대성당이다. 1909년 처음 부지를 마련해 1926년 축성했고, 1996년 원설계도대로 다시 완공했다. 이후 이곳은 종교 여부와 관계없이 이 동네의 확실한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성당 구내 한복판에 자리잡은 ‘카페 그레이스’는 서울광장을 바라보는 탁 트인 경관에다 저렴한 커피값으로 근처 직장인의 쉼터로 인기 높다. 첨성대 모형이 보이는 공간은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다.

여기서 서울시의회 옆 골목 우측으로 오르면 좌측 서양식 건물 아래 한옥 기와지붕이 멋진 성공회 성가수녀원이 보인다. 조선일보사 앞으로 이어지는 이 골목은 최근 몇 년 동안 몽로, 광화문국밥 등 음식 트렌드를 주도하는 음식점과 카페가 경쟁적으로 들어서 있다. 골목을 빠져나와 정면에 보이는 것은 동화면세점. 한때 중국 관광객을 실어나르던 버스가 길게 늘어서 있었지만 지금은 한산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새문안로2길을 거쳐 덕수궁2길로 들어서면 우측 과거 경기여고가 있던 터에는 신축공사가 한창이고, 좌측은 덕수초등학교. 모두 한 시절 명문 학교로서 명성을 날리던 곳이다.

서양식 벽돌건물과 한국 기와가 조화를 이루는 성공회 성가수녀원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다 왼쪽으로 만나는 석조와 붉은색 벽돌로 이뤄진 건물은 구세군중앙회관이다. 구세군 건물이 이곳에 처음 완공된 것은 1928년, 중앙현관의 4개 기둥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반영했으며 런던 고아보호소였던 영국 콩그레스 홀의 정면 외관을 그대로 빌렸다고 한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학대학 건물이며 자선냄비로 유명한 구세군 본부로 사용되다가 좌측 동은 구세군역사박물관 그리고 중앙건물은 ‘정동1928 아트센터’로 용도가 바뀌었다. 공연장, 전시갤러리, 인문학 아카데미, 사진관 등 복합문화공간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기대했지만, 이곳 역시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다. 일반에게도 공개된 2층 강당으로 들어가보면 보와 기둥 없이 벽과 기둥으로만 받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종교건물에 이처럼 박공벽과 박공지붕으로 마감한 것은 드문데, 화려함이 아니라 검소함과 단순함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한다. 골목을 산책하다가 건물 안 북카페에서 차 한잔 하며 책 읽기에 좋다.

구세군중앙회관. 지금은 정동1928 아트센터

여기서 덕수궁 돌담이 시작되는 골목, 즉 경비병력이 지키는 곳은 미국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 그 맞은편으로 돌담길을 따라 작은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한식 레스토랑 ‘콩두’가 마치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다. 콩과 장을 기반으로 한 담백한 음식점으로, 광화문 근처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업무 약속 장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향하면 영국대사관저 후문, 그 골목으로 더 가면 덕수궁 옆문이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세실극장 앞과 만나게 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흐름이 끊겨 아쉽다.

우측은 미국대사 관저, 좌측은 덕수궁

콩과 장으로 만든 음식점 콩두

시청역 방향으로 걷는데 태양이 뜨겁다. 영화 <노팅힐>의 배경 음악 ‘Ain’t No Sunshine’(햇볕이 비치지 않아요)을 들으며 시원한 팥빙수나 한 그릇 먹어야겠다.

글·사진 손관승 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