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인 되기

기분 나쁘지 않은 거절, 아름다운 거절

불청객 때문에 냉가슴 앓는 LA동포 여성 “친하지도 않은 동창까지…”

등록 : 2016-06-30 15:02 수정 : 2016-08-11 14:5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Q.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는 40대 중반의 여성입니다.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막지 말라”는 어른들의 가르침도 있고, 저 역시 사람이 그리워서 손님이 오면 대부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방학이 다가오면서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서울에서 걸려 오는 전화와 카톡 때문에 남모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어학연수를 위해 자녀를 맡기고 싶다는 요청에서부터 가족여행으로 얼마 동안 신세 좀 지겠다는 사람들, 사업 거리 찾을 때까지 머물겠다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다양합니다. 저도 맞벌이하느라 제 아이 교육을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자녀를 돌보아야 할지 아득합니다.

서울에 계신 분들은 이곳 사정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 번호가 찍힌 전화가 걸려오면 반가워야 할 텐데, 오히려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 친구나 친척이라면 당연히 반갑지만,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동창생이나 얼굴조차 희미한 옛 직장 동료까지 전화를 해대면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저희는 아직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부부 모두 일하러 나가야 하는데, 이런 사정을 모르고 자동차로 여기저기 안내해 주기를 원하는 분들도 있어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매정하게 거절할 수도 없고, 청을 받아들이자니 형편상 한계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하루하루 냉가슴을 앓고 있습니다.

A.확실히 여름휴가 철이 다가오고 있군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외국에 살고 있는 분들로부터 비슷한 고충을 듣고 있던 터였습니다. 제 동창생 가운데 외국에 살고 있는 한 명은 몇 달 전 다녀간 친구 때문에 홍역을 치르고 있다고 합니다. 다녀간 친구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 동창생들끼리 참여하는 ‘밴드’에 소식을 올렸는데, 그 이후 방학 때 신세 좀 질 수 없겠느냐는 카톡 문자가 동창생들에게서 쇄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탁을 하는 이쪽에서는 그저 한 명 또는 한 가족이 다녀가는 것에 불과하지만, 부탁을 받는 저쪽에서는 손님 치르다 여름 한철을 보내야 할 판이라는 겁니다. 이런 사정은 로스앤젤레스뿐 아닐 겁니다. 뉴욕, 워싱턴, 토론토 등 영어권 지역에 사는 교민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분들이 여름방학이 되면 흡사 계절병처럼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제주도와 남쪽으로 거주지를 옮긴 분들에게도 비슷한 고충을 들었습니다. 주말마다 내려오는 분들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이라고 하더군요. 가끔이라면 모를까 연중 반복되다 보니 적지 않은 스트레스 요인이라고 합니다.

상담 요청 내용을 듣고 보니 오래전 화제가 되었던 <나의 프로방스>(a Year in Provence)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런던의 광고업계에서 일하던 피터 메일이라는 영국인이 지중해와 가까운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시골 마을에 정착하며 겪는 일상을 엮은 것으로, 전 세계 30개 언어로 번역되었던 베스트셀러입니다. ‘a Good Year’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러셀 크로가 주연을 맡아 인기를 끌었지요.

피터 메일은 이 책에서 “끊임없이 닥치는 손님들을 받으며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터득해 가고 있다”고 정착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유럽의 큰 명절인 부활절에서 시작해 여름휴가철, 그리고 10월 말까지 계속 이어지는 손님들 때문에 인근의 세탁소 주인은 침대 시트 수를 헤아려 보고 숙박업을 하는 줄 알았을 정도라 말하고 있으니까요.

주인에게 폐를 덜 끼치려는 ‘교양 있는’ 손님들은 스스로 자동차를 렌트해 낮 시간을 따로 보냈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손님들은 집주인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본인들의 일정만 고집해 어려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손님들이 휴가 중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일곱 시에 일어났지만 그들은 대개 열 시나 열한 시까지 침대에서 뒹굴었다.”


그곳에도 ‘진상 손님들’ 시리즈라는 것이 있나 봅니다. 여름휴가철이 지나면 프로방스에 사는 주민들이 모여 ‘8월의 어록’이라는 말을 서로 교환한다고 했는데, 요즘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바로 ‘진상 손님들’인 셈이지요. 잔뜩 신세를 져 놓고도 식당에 가서 계산할 때는 환전하지 않아 현금이 없다고 말하거나 나중에 송금해 준다고 핑계를 대고 내빼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어느 나라나 예의 없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다는 서구에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저자 피터 메일은 이런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지요.

“교양 없는 사람은 언제 봐도 불쾌하다. 하지만 당신이 외국에 있고, 교양 없는 사람이라도 같은 국적이라면 그에게 막연한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왠지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도덕적 책무감을 느낍니다. 저도 숱한 해외 출장과 여행을 하면서 친구들이나 동창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폐를 끼쳤습니다. 지금도 얼굴 후끈거리는, 부끄러운 순간이 적지 않습니다. 저의 무지로 인해 혹은 염치가 없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저는 유럽에서 근무할 때, 이전에 신세를 졌던 분들에게 갚을 기회를 만들고자 했지만, 그분들이 저를 찾아올 기회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마음의 빚만 지고 있는 셈이지요.

농경사회가 아닌 현대사회에서 손님과 주인의 관계, 갈수록 어렵습니다. ‘두식이’와 ‘삼식이’ 남편 시리즈가 유행할 정도로 한국에서도 집에서 식사하기는 환영받지 못하는데, 하물며 대부분 맞벌이해야 하는 교민들 처지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더욱이 부모도 어찌하지 못하는 자녀를 맡아 달라고 떼쓰는 사람들을 만나는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초청하지 않았는데 온다고 떼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불청객’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은 그런 초청받지 않은 손님과 관련해 명언을 남겼습니다.

“생선과 손님은 사흘만 지나면 냄새를 풍긴다.”(Fish and visitors smell in three days)

부탁하는 분들은 현지 사정을 정확히 모르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거절을 잘하는 것도 용기입니다.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하면 됩니다. 받아 주더라도 사전에 선을 분명하게 그어야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휘청거릴 정도로 호의를 베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국적인 인정 때문에 엉겁결에 수용했다가 자칫 돈도 잃고 사람도 잃을 수 있습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라면 사전에 방지하는 게 현명합니다. 기분 나쁘지 않은 거절, 저는 그것을 ‘아름다운 거절’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아름답게 거절해 보세요!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전 iMBC 대표이사·MBC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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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