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 다가가면 ‘새로운 서울’이 열린다
서울-모스크바 자매결연 30년 기획연재 ① 서울이 모스크바를 알아야 하는 이유
등록 : 2020-09-03 15:00
한-소 수교 이후 30주년이 흘렀지만
‘한반도와 국경 맞댄 이웃’ 인식 약해
냉전시대 ‘악의 제국’ 이미지 영향인 듯
모스크바 알기, 북방 정체성 회복 계기 에너지·식량안보, 선진 과학기술까지 서울의 북방정책 성패 가를 핵심 열쇠
러시아 모스크바는 우리(서울)에게 무엇인가? 서울과 모스크바가 자매결연을 맺은 지 30년이 되는 현시점에서 다시 던져보는 질문이다. 서울-모스크바는 1991년 7월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1990년 9월30일 한-소 수교 체결 뒤 10개월 만이다. 모스크바는 여전히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지만, 사실 서울의 미래에 끼치는 영향력이 매우 큰 곳이다. 과거와 미래의 서울-모스크바, 대한민국-러시아 관계를 러시아 전문가인 김창진 성공회대학교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가 5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19세기 말 한자식으로 ‘가배’로 불린 커피. 한국인 최초 커피 애호가로 여겨지는 고종이 커피를 처음 맛본 곳은 1896년 2월부터 꼬박 1년 동안 머문 서울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이었다. 이른바 ‘아관파천’ 시기이다. 한국이 막 근대로 진입하던 시기 최고지도자가 유럽에서 들여온 기호식품을 직접 맛보고 그에 반한 곳이 다름 아닌 러시아공사관이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의 상징적 사건이라 할 만했다. 일본인들의 잔인무도한 명성황후 살해 이후 자신의 땅에서 정치적 망명 상태에 처한 황제가 즐겼던 그 커피는 무슨 맛이었을까? 고종이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을 한국사 최초의 ‘특명전권공사’로 모스크바에 파견한 것도 이 무렵이다. ‘구원자 러시아’를 향해 대한제국이 중국의 속방이 아닌 자주독립국임을 보여주고자 한 절실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1896년 4월1일 제물포항을 떠난 외교단은 일본을 경유하고 태평양을 건넜다. 이어 캐나다와 미국을 횡단하고 다시 대서양을 지나 영국 런던과 독일 베를린, 폴란드 바르샤바를 거쳐 드디어 5월1일 목적지인 모스크바에 당도했다. 이때 민영환의 수행원 김득련은 1896년 6월 초 모스크바에서 참석했던 황궁 무도회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남겼다. ‘동방예의지국의 나라 조선을 떠나 난생처음 거대한 여객선에 몸을 싣고 보니 진기한 것 일색이로다. … 양반네 진짓상에 웬 쇠스랑(포크)과 장도(나이프)가 등장하는가? 입술이 찢기지 않으면서 접시의 물건을 입에 넣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구나. … 노르스름한 절편(치즈)은 맛도 향기도 고약하구나. …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 빙빙 돌며 뛰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데(발레), 가녀린 낭자를 학대하다니, 서양 군자들은 참으로 짐승이구나.’(조재곤 편역, <해천추범> 86쪽) 서구 열강의 각축장에 내몰린 조선의 관리가 근대 서구문물을 처음 접하던 순간의 놀라움과 당혹감, 한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한국과 러시아가 정부 수준에서 처음 대면한 이때의 풍경처럼 정치적으로는 절박했으나 문화적으로는 사뭇 흥미롭게 조우한 순간을 두 나라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게 된다.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체호프는 한국 근대문학의 여명기를 환하게 비춘 등불이자 따라 올라가야 할 산맥이었다. 이동휘에서 조봉암까지 1920년대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러시아혁명 이후 1919년에 모스크바에 설립된 코민테른을 통해 레닌의 소비에트연방이 동방의 식민지·종속국 해방운동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발터 베냐민과 니코스 카잔차키스, 앙드레 지드 같은 유럽 지식인들이 모스크바 방문의 개인적 소회를 남기는 동안 조선의 혁명가들은 조국의 운명을 붙들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청나라 요구로 ‘나선정벌’(1654년)에 나선 조선이 상대의 정체도 모른 채 맞섰던 러시아와 근대적 조약을 맺은 것은 그로부터 230년 만인 1884년의 조로수호통상조약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세기가 지난 1990년 9월 한-소 수교를 이루고 이제 30주년이 되었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거대한 이웃 나라이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서울에서 보이지 않는다. 평소 한국인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러시아를 접경국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그저 막연하게 두렵거나 거리감을 느꼈던 모스크바를 근래 실제로 방문한 한국인들은 그 도시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문화적 풍성함, 매혹적인 사람들의 따뜻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크레믈을 ‘악의 제국’의 음울한 본산이라고 배웠던 냉전 세대, 1990년대 전후 러시아가 최악의 추락을 겪던 시기에 잠깐 다녀간 사람들이 지닌 인상과 오늘의 모스크바는 천양지차라고 할 만큼 변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전 한국 젊은이로 넘쳐났던 블라디보스토크와는 전혀 다른, ‘유럽-러시아’라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정동에 남아 있는 러시아공사관 터와 아현동의 육중한 돔 양식 정교회는 서울에 남겨진 러시아의 역사적 자취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날마다 에프엠(FM)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차이콥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클래식을 듣고, 가슴을 저리게 하는 러시아 로망스에 빠져든다. 하지만 모스크바에 한국문화원이 개설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여태 서울에 번듯한 러시아 문화원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2005~2006년 필자와 동료들이 홍대 앞에서 운영했던 ‘러시아문화의 집’이 안타까운 민간 문화원 역할을 잠시 맡았을 뿐이었다. 한국에서 러시아는 가장 과소평가되고, 왜곡된 이미지를 가진 나라이다. 러시아를 여전히 소련과 동일시하는 보통 사람이 다수이고, 러시아는 주요한 국제정치 행위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언론인과 지식인, 정치인, 외교관이 대다수이다. 한국이 여전히 유아적인 세계 인식, 국가이익 개념에 대한 거대한 무지라고 할 정도로 편견의 장벽에 갇힌 나라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모스크바에 대한 서울의 태도이다. 서구가 조장한 러시아 혐오증(루소포비아)에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중독된 상태로 지내온 탓일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 정책을 선호하고 여전히 공공외교에 소극성을 보이는 모스크바의 태도 또한 한몫하고 있다. 서울에 모스크바는 무엇인가? 모스크바를 안다는 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또 다른 세계를 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유일하게 고전 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나라, 유럽인의 얼굴을 하고 아시아인과 마음이 통하는 러시아는 유라시아 문명이라는 새로운 세계이다. 생활환경의 엄청난 차이에도, 한국인과 러시아인은 공동체성과 평등주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광활한 시베리아 평원에서 유럽까지 펼쳐진 러시아는 한국인의 북방 정체성을 회복하는 계기 그 자체이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주변 4강 중 가장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 한국인의 자치 역량, 그리고 남북한의 평화체제 구축’을 지지해온 나라이다. 에너지와 식량안보 차원에서부터 세계에서 으뜸 수준의 과학기술 협력과 4차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북방정책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파트너가 바로 모스크바이다. 점점 심화돼가는 미-중 경쟁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균형외교’를 지향한다면 가장 적절한 파트너를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말기와는 달리 경제력은 물론 문화력의 분출과 함께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제도화에서 자신감을 갖게 된 서울을 모스크바 또한 기꺼이 함께할 파트너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창진 성공회대학교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모스크바 알기, 북방 정체성 회복 계기 에너지·식량안보, 선진 과학기술까지 서울의 북방정책 성패 가를 핵심 열쇠
자매결연을 맺은 지 30년 된 서울과 모스크바가 서로 좀더 가까이 다가선다면, 서울과 모스크바 모두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 높다. 모스크바 크레믈 궁전 일대(사진 위)와 서울 경복궁 일대.
러시아 모스크바는 우리(서울)에게 무엇인가? 서울과 모스크바가 자매결연을 맺은 지 30년이 되는 현시점에서 다시 던져보는 질문이다. 서울-모스크바는 1991년 7월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1990년 9월30일 한-소 수교 체결 뒤 10개월 만이다. 모스크바는 여전히 우리에게 멀게만 느껴지지만, 사실 서울의 미래에 끼치는 영향력이 매우 큰 곳이다. 과거와 미래의 서울-모스크바, 대한민국-러시아 관계를 러시아 전문가인 김창진 성공회대학교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가 5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19세기 말 한자식으로 ‘가배’로 불린 커피. 한국인 최초 커피 애호가로 여겨지는 고종이 커피를 처음 맛본 곳은 1896년 2월부터 꼬박 1년 동안 머문 서울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이었다. 이른바 ‘아관파천’ 시기이다. 한국이 막 근대로 진입하던 시기 최고지도자가 유럽에서 들여온 기호식품을 직접 맛보고 그에 반한 곳이 다름 아닌 러시아공사관이었다는 사실은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의 상징적 사건이라 할 만했다. 일본인들의 잔인무도한 명성황후 살해 이후 자신의 땅에서 정치적 망명 상태에 처한 황제가 즐겼던 그 커피는 무슨 맛이었을까? 고종이 러시아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을 한국사 최초의 ‘특명전권공사’로 모스크바에 파견한 것도 이 무렵이다. ‘구원자 러시아’를 향해 대한제국이 중국의 속방이 아닌 자주독립국임을 보여주고자 한 절실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1896년 4월1일 제물포항을 떠난 외교단은 일본을 경유하고 태평양을 건넜다. 이어 캐나다와 미국을 횡단하고 다시 대서양을 지나 영국 런던과 독일 베를린, 폴란드 바르샤바를 거쳐 드디어 5월1일 목적지인 모스크바에 당도했다. 이때 민영환의 수행원 김득련은 1896년 6월 초 모스크바에서 참석했던 황궁 무도회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남겼다. ‘동방예의지국의 나라 조선을 떠나 난생처음 거대한 여객선에 몸을 싣고 보니 진기한 것 일색이로다. … 양반네 진짓상에 웬 쇠스랑(포크)과 장도(나이프)가 등장하는가? 입술이 찢기지 않으면서 접시의 물건을 입에 넣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구나. … 노르스름한 절편(치즈)은 맛도 향기도 고약하구나. …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 빙빙 돌며 뛰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데(발레), 가녀린 낭자를 학대하다니, 서양 군자들은 참으로 짐승이구나.’(조재곤 편역, <해천추범> 86쪽) 서구 열강의 각축장에 내몰린 조선의 관리가 근대 서구문물을 처음 접하던 순간의 놀라움과 당혹감, 한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한국과 러시아가 정부 수준에서 처음 대면한 이때의 풍경처럼 정치적으로는 절박했으나 문화적으로는 사뭇 흥미롭게 조우한 순간을 두 나라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게 된다.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체호프는 한국 근대문학의 여명기를 환하게 비춘 등불이자 따라 올라가야 할 산맥이었다. 이동휘에서 조봉암까지 1920년대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러시아혁명 이후 1919년에 모스크바에 설립된 코민테른을 통해 레닌의 소비에트연방이 동방의 식민지·종속국 해방운동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발터 베냐민과 니코스 카잔차키스, 앙드레 지드 같은 유럽 지식인들이 모스크바 방문의 개인적 소회를 남기는 동안 조선의 혁명가들은 조국의 운명을 붙들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청나라 요구로 ‘나선정벌’(1654년)에 나선 조선이 상대의 정체도 모른 채 맞섰던 러시아와 근대적 조약을 맺은 것은 그로부터 230년 만인 1884년의 조로수호통상조약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세기가 지난 1990년 9월 한-소 수교를 이루고 이제 30주년이 되었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거대한 이웃 나라이다. 하지만 모스크바는 서울에서 보이지 않는다. 평소 한국인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러시아를 접경국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그저 막연하게 두렵거나 거리감을 느꼈던 모스크바를 근래 실제로 방문한 한국인들은 그 도시의 찬란한 아름다움과 문화적 풍성함, 매혹적인 사람들의 따뜻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크레믈을 ‘악의 제국’의 음울한 본산이라고 배웠던 냉전 세대, 1990년대 전후 러시아가 최악의 추락을 겪던 시기에 잠깐 다녀간 사람들이 지닌 인상과 오늘의 모스크바는 천양지차라고 할 만큼 변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이전 한국 젊은이로 넘쳐났던 블라디보스토크와는 전혀 다른, ‘유럽-러시아’라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정동에 남아 있는 러시아공사관 터와 아현동의 육중한 돔 양식 정교회는 서울에 남겨진 러시아의 역사적 자취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날마다 에프엠(FM)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차이콥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클래식을 듣고, 가슴을 저리게 하는 러시아 로망스에 빠져든다. 하지만 모스크바에 한국문화원이 개설된 지 한참 지났는데도 여태 서울에 번듯한 러시아 문화원이 부재한다는 사실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2005~2006년 필자와 동료들이 홍대 앞에서 운영했던 ‘러시아문화의 집’이 안타까운 민간 문화원 역할을 잠시 맡았을 뿐이었다. 한국에서 러시아는 가장 과소평가되고, 왜곡된 이미지를 가진 나라이다. 러시아를 여전히 소련과 동일시하는 보통 사람이 다수이고, 러시아는 주요한 국제정치 행위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언론인과 지식인, 정치인, 외교관이 대다수이다. 한국이 여전히 유아적인 세계 인식, 국가이익 개념에 대한 거대한 무지라고 할 정도로 편견의 장벽에 갇힌 나라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모스크바에 대한 서울의 태도이다. 서구가 조장한 러시아 혐오증(루소포비아)에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중독된 상태로 지내온 탓일 것이다. 여기에는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현상유지 정책을 선호하고 여전히 공공외교에 소극성을 보이는 모스크바의 태도 또한 한몫하고 있다. 서울에 모스크바는 무엇인가? 모스크바를 안다는 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또 다른 세계를 안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유일하게 고전 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는 나라, 유럽인의 얼굴을 하고 아시아인과 마음이 통하는 러시아는 유라시아 문명이라는 새로운 세계이다. 생활환경의 엄청난 차이에도, 한국인과 러시아인은 공동체성과 평등주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광활한 시베리아 평원에서 유럽까지 펼쳐진 러시아는 한국인의 북방 정체성을 회복하는 계기 그 자체이다. 역사적으로 러시아는 주변 4강 중 가장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 한국인의 자치 역량, 그리고 남북한의 평화체제 구축’을 지지해온 나라이다. 에너지와 식량안보 차원에서부터 세계에서 으뜸 수준의 과학기술 협력과 4차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북방정책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파트너가 바로 모스크바이다. 점점 심화돼가는 미-중 경쟁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균형외교’를 지향한다면 가장 적절한 파트너를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말기와는 달리 경제력은 물론 문화력의 분출과 함께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제도화에서 자신감을 갖게 된 서울을 모스크바 또한 기꺼이 함께할 파트너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창진 성공회대학교 사회융합자율학부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