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 문학기행

표본실에 갇힌 청개구리의 암울한 현실은 변함없이…

체부동에서 방학동까지, 자연주의 선구 작가 횡보 염상섭의 흔적을 찾아서

등록 : 2016-07-07 15:09 수정 : 2016-07-07 15:37

일본에서 독립선언서를 쓴 횡보 염상섭, 우리나라에서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작품을 처음 선보였다는 평을 받는 염상섭. 그의 흔적을 찾아다녔던 날은 그가 작품에 담았던 일제강점기를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삶처럼 암울한 먹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은 하루였다.  

염상섭의 출현에 긴장한 건 김동인이었다. 염상섭이 1897년에 태어났고 김동인이 1900년에 태어났으므로 나이는 염상섭이 많았지만 김동인은 1919년 <약한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한 반면, 염상섭은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서울에서 태어난 염상섭은 보성중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공부한다. 일본 유학 시절 유럽에서 들어온 자연주의 문학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귀국한 뒤 발표한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이다. 김동인은 <조선근대소설고>라는 글에서 염상섭의 출현에 대해 ‘강적이 나타났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천왕사 거사를 준비하다

1919년 3월19일 일본 오사카 천왕사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자 결의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에서 살고 있던 조선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의 거사 계획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거사 하루 전인 3월18일 거사를 준비하던 주요 인물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횡보 염상섭은 거사를 준비하면서 천왕사에서 낭독할 독립선언서를 직접 썼다.  

“…일본은 조선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잔혹하고 무도했는가를 오인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일본인들 스스로 돌아보고 크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 폭력이 무서워 복종하기에는 너무도 자유의 존엄성을 깨닫고 있는데 주저할 것이 무었이겠는가. 이에 목숨을 걸고 독립을 선언하는 바이다.” (염상섭이 쓴 ‘독립선언서’ 일부)  경찰에 체포된 염상섭은 1심에서 금고 10개월을 받고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약 석 달 동안 그는 철창에 갇혀 있어야 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1921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와 김창억과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자 염상섭 자신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1922년부터 쓰기 시작한 <만세전>은 주인공 이인화가 일본 동경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작품이다. 천왕사 거사를 준비하다 체포된 뒤 일본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염상섭 자신의 이야기와 닮았다.

염상섭이 살던 체부동 집터    

염상섭이 마지막으로 살던 집터
 

염상섭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 첫머리는 서울사직단이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와서 직진하면 서울사직단이 나온다. 서울사직단은 조선시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를 올렸던 곳이다. 조선 건국 이후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1395년 사직단을 지었다.  

염상섭이 태어난 곳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지금의 서울사직단 부근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염상섭은 종로구 체부동, 마포구 아현동, 동작구 상도동, 강북구 삼양동 등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성북구 성북동에서 생을 마감한다.  

중앙대학교 오창은 교수에 따르면 염상섭이 살던 체부동 집 주소는 체부동 106-1이다. 서울사직단 부근 CU편의점 앞 이정표 가운데 ‘인왕산 수성동 계곡’ 방향으로 간다. 환경운동연합 건물이 있는 갈림길에서 일방통행 도로로 접어들어 약 40m 정도 가다 보면 길 오른쪽에 청마빌라가 보인다. 그곳이 염상섭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서 서울사직단을 뒤로하고 광화문을 지나 교보빌딩 뒤에서 걸음을 멈춘다.    

염상섭 상
아이들의 포토존이 된 염상섭 상  

교보빌딩 뒤에 ‘염상섭 상’이 있다. 긴 의자 한쪽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다.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 나온 부모들은 아이를 ‘염상섭 상’ 옆에 앉히고 사진을 찍는다. 장난기 많은 아이들은 ‘염상섭 상’ 이마에 있는 혹을 만지작거리며 웃는다.  

‘염상섭 상’은 1996년 종묘 광장에 설치했다. 원래는 염상섭이 태어난 곳에 세울 계획이었지만 출생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종묘 광장에 설치했던 것이다. 이후 ‘염상섭 상’은 2009년 삼청공원으로 이전 설치되었다가 2014년 지금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그의 상 옆에 있는 작은 비석에 ‘염상섭은 1897년에 종로에서 출생하여 1920년 <폐허> 창간 동인으로 신문학 운동을 시작한 이래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 등 많은 작품을 발표, 한국 소설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라고 적혔다.  

‘염상섭 상’에서 종각역 네거리 방향으로 걷는다. 네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조계사에 이른다. 조계사는 염상섭이 다녔던 보성중학교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학교의 흔적은 없지만 절 마당에 있는 백송이 눈길을 끈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500년 정도 되며 천연기념물 제9호로 지정됐다.    

혜화동성당 방학동 묘원에 묻힌 염상섭  

옛 보성중학교 터(현재 조계사)

조계사에서 나와 길을 건너 시내버스를 타고 한성대입구역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다.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를 지나서 직진하다가 소문난잔치국수집 앞에서 우회전한다. 조금 올라가다 보면 길이 갈라지는데 왼쪽 길로 간다. 성북구 성북동 145-52 일대에 염상섭이 살던 생의 마지막 집이 있었다고 알려졌다. 염상섭은 혜화동성당 방학동 묘원에 묻혔다.

염상섭의 묘
 

성북동에서 나와 한성대입구 시내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버스를 타고 미아역·신일중고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130번 버스로 갈아타고 연산군·정의공주묘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다. 버스 진행 방향으로 조금 걷다 보면 혜화동성당 방학동 묘원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 방향으로 걷는다.  

혜화동성당 방학동 묘원으로 들어가서 큰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길 오른쪽에 ‘작가 염상섭 묘소’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 뒤로 조금만 올라가면 염상섭의 묘가 있다. 염상섭은 천주교 신자였다. 세례명은 바오로다.  

염상섭의 흔적을 찾아다니던 발길을 염상섭 묘 앞에서 멈춘다. 하루 종일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이 걷히고 파란 하늘이 보인다. 눈부신 햇살이 돌아가는 길을 비춘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