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20년 넘게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은 싼값으로 먹거리를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일본의 생활 시스템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복합상가 아파트로 1층에 대형 슈퍼를 비롯해 채소, 빵, 정육점 가게들이 ㄷ자 형태로 들어서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인기 많은 곳이 슈퍼마켓(사진)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저녁 7시가 넘으면 날마다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물론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일본의 슈퍼는 대개 밤 9~10시 사이에 문을 닫는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슈퍼는 밤 9시에 문을 닫는다. 그래서 저녁 7시가 넘으면 유효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식료품부터 20% 내린 값으로 팔기 시작한다. 다시 30여 분이 지나면 30%, 8시가 넘으면 무조건 반값이다. 8시 반이 넘으면 100엔으로 ‘땡처리’ 된다.
땡처리 식품 중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20가지가 넘는 ‘벤토’(도시락)류와 ‘고로케’(크로켓), 튀김 등 반찬 종류다. 때문에 독신자나 고령자들은 7시가 넘으면 20~30% 내린 가격이 붙은 식품을 바구니에 넣고 슈퍼 안을 어슬렁어슬렁 다닌다. 100엔대로 대폭 값이 내려가는 8시가 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다 8시가 넘으면 재빨리 금액을 수정하는 바코드 기기를 든 종업원에게 달려가 바구니를 내민다. 그러면 종업원은 이런 풍경에 익숙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빠르게 금액을 고쳐 준다.
이런 풍경이 저녁마다 생기다 보니, 7시가 넘으면 이웃사촌끼리 벤토 쟁탈전을 벌이는 민망한 상황이 심심찮게 연출된다. 더운 날이나 추운 날에는 7시가 되자마자 모든 벤토가 동이 날 때가 많다. 미리 바구니에 넣고 슈퍼를 빙빙 도는 얌체족이 많은 탓이다.
다행히 얌체족이 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운이 좋은 날에는 8시에 가도 1000엔(1만1000원)에 돈가스, 생선회 같은 음식을 한 바구니 살 수 있다.
과일이나 채소도 마찬가지다. 날것인 탓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아주 싸게 팔아, 평소 비싸 사 먹지 못하던 고급 과일로 입이 호강할 때도 있다. 그래서 7시가 넘으면 내가 사는 아파트 1층 슈퍼에는 떨이 식품을 사러 일부러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 사람들로 붐빈다. 최근에는 인근 와세다 대학과 미용·제과 전문학교에 다니는 한국 유학생들까지 소문 듣고 찾아와 동네 사람들 발걸음이 더 바빠졌다.
이런 슈퍼마켓 운영 시스템을 보면, 돈 없는 서민이 살기에는 일본이 적어도 우리나라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양국의 일반 물가도 서울이 일본보다 훨씬 비싸다. 일본에서는 1000엔이면 생선과 채소 같은 웬만한 반찬 재료 서너 가지를 살 수 있다. 재래식 상점은 슈퍼보다 더 싸다. 뿐만 아니라 동네 어디를 가더라도 100엔으로 수만 점의 생필품을 살 수 있는 100엔 코너도 있다.
일본에 20년 넘게 살면서 가장 고마운 것이 바로 이 슈퍼마켓 시스템이다. 땡처리 시간을 즐겨 이용하니 저렴한 비용으로 원하는 음식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먹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손님이 올 때는 더더욱 고맙다.
며칠 전, 초·중·고를 모두 일본 학교에서 다닌 딸아이와 함께 슈퍼에 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7시가 넘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원하는 식료품을 장바구니에 넣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벤토 코너에 들렀다. 그런데 그날따라 8시가 채 안 되었는데도 ‘돈가스 벤토’가 반값인 178엔에 팔리고 있었다. 나는 웬 횡재냐 하고 얼른 식구 수대로 바구니에 담았다. 만들어 먹는 것보다 훨씬 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보던 딸아이가 핀잔하듯 말했다.
“엄마가 싸다고 다 사재기해 버리면 혼자 사는 사람이 와서 살 게 없잖아?”
딸아이의 말인즉, 뒤의 올 손님을 생각지 않고 몽땅 사재기하는 것은 결코 양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 말에 4개 중 하나만 남겨 놓고 3개를 제자리에 갖다놓고 주위를 살폈다. 그 순간 70대 할아버지가 재빨리 그 하나를 집어 당신 장바구니에 넣었다. 아마도 줄곧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딸아이가 그거 보란 듯이 나를 쏘아보았다.
유재순 일본 전문 온라인매체 <제이피뉴스> 대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