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과 어울린 나무, 향기로운 사람 이야기도 품어

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⑭ 성북구의 오래된 나무와 겨울 숲

등록 : 2020-12-31 10:11 수정 : 2020-12-31 11:59
이태준·한용운·최순우의 손을 탔을

향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사철나무

사람은 떠나가고 가옥만 남았는데

나무는 집을 지키며, 그리움 전한다

성북동 골짜기 한옥과 어울린 나무는 향기로운 사람의 이야기도 품었다. 향나무의 운치 가득한 최순우 옛집, 작은 수양회화나무와 느티나무 고목이 어울린 길상사, 한지에 비친 햇살 그윽한 소설가 이태준의 집 마당 사철나무, 한용운의 집 심우장을 지키는 소나무와 향나무….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에는 느티나무 고목과 금강송이 겨울 손님들을 맞이하고, 경종 임금과 두 번째 왕비인 선의왕후 어씨의 능인 의릉의 향나무는 기이한 모습으로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최순우 옛집 마당에서 자라는 향나무. 한옥과 어울려 운치를 자아낸다. 최순우 옛집은 겨울이라 개방하지 않는다. 2018년 봄에 찍은 사진이다.

나무의 향기, 사람의 향기

지하철 한성대입구역에서 성북로를 따라 걷는 길에서 한옥과 나무와 사람의 향기가 어우러진 공간을 만났다.


최순우 옛집에 앉아 있으면 숨소리도 그윽해진다. ‘ㄱ’ 자 건물과 ‘ㄴ’ 자 건물이 마주보고 있어 터진 ‘ㅁ’ 자 공간을 만들었다. 네모난 마당에 하늘이 고인다. 사나운 바람도 이곳에 들면 순해진다. 눈은 고스란히 쌓이고 빗방울 듣는 소리는 마당에 스민다. 꽃이 피어 봄을 알고 잎 진 자리에서 겨울을 보니 시간도 보이는 듯하다. 그 마당에 농밀한 풍경의 긴장감을 지키고 있는 120년 넘은 향나무가 있다. 네모난 마당에 뿌리를 내리고 네모난 하늘, 지붕 위로 솟은 푸른 나무의 기운이 그 공간에 가득하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가 1976년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그가 쓴, ‘문을 닫으면 곧 깊은 산속’이라는 뜻의 ‘두문즉시심산’이란 글귀의 중심에 이 향나무가 서 있는 듯하다.

‘오수당’이라는 현판도 보인다. ‘낮잠 자는 방’이라는 뜻이다. 낮잠 자는 노인이라는 뜻의 ‘오수노인’ ‘낮잠막’이라고 새긴 것도 있다. 그 방에서 한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방바닥에 비껴드는 오후의 햇살 한 조각을 바라보며 하품하고 싶어진다. 그 방에서 심지에 향을 머금고 천연스럽게 서 있는 향나무를 보며 깊은숨을 쉬는 상상을 해본다.

최순우 옛집에서 나와 다시 성북로를 따라 걷는다. 듬직한 가로수 줄기에 겨울 거리도 쓸쓸하지 않다. 성북로에서 선잠로로 접어들었다. 길상사로 가는 길이다.

길상사에도 오래된 나무가 두 그루 있다. 일주문을 지나 길상7층보탑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200년 넘은 느티나무가 다른 나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극락전 앞아래 마당에 있는 느티나무는 300년이 넘었다. 극락전 앞마당에는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된 느티나무도 있다. 하지만 길상사의 많은 나무 가운데 눈길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다. 극락전 앞마당 부처상 뒤에서 우산을 펼친 모양으로 자라는 수양회화나무가 그것이다. 그 나무를 지나 법정 스님이 머물렀다는 진영각으로 가는 길, 낙엽 가라앉은 계곡 물에 부처상이 비친다.


수연산방과 심우장의 나무들

성북동 골짜기에 김광섭, 조지훈, 이태준, 한용운 등 시인과 소설가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정지용, 이상, 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를 만들어 활동했던 소설가 이태준과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이 살던 집이 오래된 나무와 함께 남아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이태준이 살던 집은 수연산방으로 불린다. 원래 일반 가정집이었는데, 1990년대 말에 찻집이 됐다. 이태준이 살며 글을 쓰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 문인들과 국문과 학생들이 찾아오곤 했다. 문학의 향기와 한옥의 운치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은 점점 늘어났다.

기와지붕, 마루, 서까래, 창호, 마당과 뒤안, 돌담 등 한옥의 멋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 없지만, 한지 바른 창을 통해 걸러진 햇빛이 파스텔톤으로 방바닥에 내려앉는 겨울 오전의 방 안 풍경이 으뜸이다.

수연산방은 마당 깊은 집이다. 차와 한옥의 운치를 즐기고 돌아가는 길, 툇마루에 서서 바라보는 마당 한쪽에 70년을 훌쩍 넘긴 사철나무가 보인다. 이태준이 이 집에서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살았으니, 이태준의 손을 탔을 것이다.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됐다.

심우장 향나무. 한용운이 심은 나무다.

수연산방에서 나와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달동네 좁은 골목으로 올라가다보면 담장 밖으로 우뚝 솟은 향나무가 보인다. 그 집이 심우장이다. 커다란 소나무도 담장 밖까지 가지를 드리웠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 세상을 뜰 때까지 살던 집이다. 심우장을 돌보는 사람에 따르면 소나무는 심우장이 지어지기 전부터 있던 나무로 10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한다. 마당 한쪽 구석에 있는 향나무는 한용운이 직접 심은 것이다. 보통 향나무와 다르게 곧고 힘차게 자랐다. 한용운의 임종을 지킨 나무 두 그루가 심우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1919년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대표 중 한 사람으로 3·1 독립선언문의 공약삼장을 썼던 한용운의 마음처럼 향나무와 소나무는 심우장을 지키고 있다.


왕릉의 나무와 겨울 숲

정릉동 골짜기에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있다. 정릉은 원래 지금의 중구 정동에 있었는데, 태종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능을 옮길 당시 태종은 정릉의 병풍석과 석물 등을 청계천 광통교를 복구하는 데 썼다. 조선 후기 송시열 등에 의해 능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능은 오래된 나무와 숲이 좋다. 정릉 정문을 지나 왼쪽으로 돌아서면 재실이 나온다. 재실 앞 느티나무가 380년이 넘었으니, 홀대받고 세월에 묻혔던 정릉을 지금의 모습처럼 단장하는 것을 지켜봤을 것이다. 재실 옆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르다보면 재실 뒤편에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를 볼 수 있다. 이 나무도 380살이 넘었다. 관리사무소 건물 주변에 있는 느티나무는 200년을 갓 넘겼다. 이 느티나무들이 정릉에 있는 보호수다.

보호수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사람들 눈길을 끄는 나무는 홍살문 앞에 있는 금강송이다. 커다란 나무가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홍살문 금강송을 보고 숲으로 걸었다. 앙상한 줄기 빈 가지 겨울나무들이 촘촘하게 얽힌 겨울 숲 산책길이 좋다.

정릉 홍살문 앞에 있는 금강송.

정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덕왕후의 원찰인 흥천사가 있다. 흥천사 입구 길가에 ‘성북구 돈암동 느티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다. 350여 년 된 이 나무는 한때 고사 위기를 맞았는데, 흥천사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이 치료하여 다시 살아났다. 흥천사 나무 중 눈길을 사로잡는건 연화대 옆 라일락 나무다. 제 몸 비틀고 구부러뜨리며 자란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 향기가 그윽하다. 꽃향기 따라 극락왕생하라는 뜻으로 연화대 옆에 라일락을 심었다는 누군가의 마음이 향기롭다.

성북구에 왕릉이 또 한 곳 있다. 조선시대 경종 임금과 두 번째 왕비인 선의왕후 어씨의 능인 의릉이다. 경종 임금은 사극의 단골 메뉴인 장희빈의 아들이다. 의릉은 왕과 왕비의 능을 앞뒤로 배치한 보기 드문 형태다. 뒤에 있는 능이 경종의 능이다. 능 주변 키 작은 소나무 숲 산책로에서 능 뒤로 이어지는 숲길을 따른다. 그 길에서 기이하게 생긴 향나무를 만났다. 160년 정도 됐다는 이 향나무는 줄기가 두 쪽으로 넓게 갈라져 자란다. 비틀어지고 파인 줄기에서 고통이 느껴진다. 어떻게든 자식을 왕으로 만들려던 장희빈의 애절한 마음이 저랬을까?

*최순우 옛집은 겨울철 휴관 기간이다. 수연산방은 취재 당시 잠시 문을 닫았고, 심우장은 코로나19로 문을 열지 않았다.

의릉 뒤쪽 산책로에 있는 160년 정도 된 향나무가 기이한 모양으로 자란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