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우리’

흉노의 옛 땅 ‘장예’에서, 문화상대주의를 다시 생각하다

길 위에서 만난 ‘우리’ ④ 한나라의 또다른 4군이 설치됐던 중국 간쑤성 장예 이야기

등록 : 2021-03-18 15:37 수정 : 2021-04-15 17:10
기원전 121년 한사군 설치됐던 지역

그 뒤 흉노에 의한 ‘회복’은 없었지만

‘중화’와는 다른 색채 아직도 남아 있어


‘흉노의 후손 아니냐’고 질문 던지자

화들짝 놀라는 ‘중국인’ 리씨의 모습

문화의 상대적 가치 다시 떠올리게 해

몽골리안 위구르족 자치마을 고원 위에 있는 티베트불교의 모습. 튀르크 계통의 민족인 몽골리안 위구르족은 신장의 위구르족과 달리 티베트불교와 샤머니즘을 종교로 가지고 있다.


2016년 중국 서북부 간쑤성의 장예를 찾았다. 간쑤성 동쪽 산시성 성도인 시안에서 출발해 간쑤성 성도 란저우를 거쳐 장예에 도착했다. 장예를 여행하는 동안 내내 필자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비슷한 시기 한나라에 의해 정복된 고조선과 흉노의 ‘같지만 다른’ 운명이었다.

간쑤성은 대부분 흉노의 땅이었다. 기원전 4세기 때부터 세력을 넓혔던 흉노는 기원전 121년 한나라와의 격전에서 패배한 뒤 간쑤성 지역 땅을 잃었다. 한나라는 이 땅에 4군을 설치했는데, 그 4군 중 하나가 ‘장예’다. 한나라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설치하기 10여년 전 일이다.

고조선이 무너진 땅에서는 부여와 고구려 등이 일어서 결국 한사군을 몰아냈지만, 장예는 그런 회복 운동이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중국의 통치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흉노의 흔적은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첫 출발지는 장예에서 1시간 동안 차를 타고 도착한 몽골리안 위구르족 자치마을이다. 그곳에서 필자는 ‘바보 같은 상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3천~4천m 높이까지 올라간 뒤 도달한 곳이 뾰족한 봉우리가 아니라 넓디넓은 평원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개마고원이 이런 모습일까?’ 필자는 잠시 넋을 놓은 듯 있다가 무심결에 “이런 곳에서 무슨 철학이 필요하지?”라고 혼자 조용히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철학은 도시인의 사고방식이기에 이런 곳에서는 철학이 불필요하다는 것이었을까? 아직도 그 답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의 철학’은 정말 ‘우리와는 다른 철학’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확인했다.

‘푸르고 작은 풀, 발밑에 남긴 정’. 풀밭에 들어가지 말라고 4개 국어로 쓰인 안내판.

그 고원에는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 있었다. ‘잔디밭’이 아니라 ‘풀밭’이었다. ‘인간이 보기에 좋아서 가꾸는 잔디밭’이 아니라 ‘양들이 뜯어 먹어야 할 잡초밭’에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다.

양이 살아야 인간이 사는 곳이다. 그래서 발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도 고원 위에 펼쳐진 그 풀밭 위에 흰 점처럼 박혀 있는 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1916~?)이 북한에서 1962년 펴낸 <고조선 연구>라는 책(남한에서는 2018년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로 출판)에서는 부여, 고구려, 백제의 오행(五行)사상을 언급한다. 그는 특히 부여에는 우가, 저가, 마가, 구가의 ‘가’를 모두 ‘칸’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중앙에는 ‘대칸’이 있었다는 게 그의 해석이다. 그런데 흔히 5부족 연맹체로 설명하는 부여의 부족에는 소, 돼지, 말, 개는 있지만 양은 없다. 그래서 리지린은 부여를 목축이 아닌 농경 중심 국가로 설명한다.

장예 대불사 가는 길. 파란색의 상점 간판이 눈에 띈다.

다시 장예에 들어서면서 문득 느낀 것이 도시가 온통 파란색이라는 점이었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 지배인 격인 중국인과 1일 투어를 했다.

“여기는 왜 이렇게 파란색이 많죠? 베이징이나 상하이는 온통 빨간색이 많고, 중국인은 빨간색을 좋아하지 않나요?”

내 질문을 들은 중국인 안내자는 잠깐 고민한다. 실제로 중국에서 간판들은 대부분 빨간색 바탕에 글씨를 쓴다. 그리고 등부터 시작해 거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빨간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새빨갛다. 그러나 장예는 파란색의 도시다. 장예는 대부분의 상점 간판들이 파란색 바탕에 글씨를 쓴다. 관공서의 안내판이나 광고판도 파란색이 많다. 중국인 가이드가 안내한 와불(臥佛)이 있는 절 입구는 완전 파란색이다. 정말 신기했다. 그 중국인 안내자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듣고 보니 파란색이 많네요.”

“그러니까요. 여기에 오래 살았나요?”

“여기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장예에서만 살았어요. 그런데 한 번도 파란색이 많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파란색이 많네요. 아마도 이슬람교도가 많아서 그렇지 않나 싶네요.”

귀국한 뒤 왜 이슬람은 파란색일까 고민해보았다. 그리고 파란색을 뜻하는 ‘블루’(blue)라는 영어 단어에 왜 ‘우울함’이라는 뜻이 들어가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종교시설로 따지면 크리스트교는 특정 색이 없지만 불교는 빨간 단청이 많은 편이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도 다양한 색이 있지만, 불교의 영향 탓인지 외국인들의 눈에는 빨간색이 많은 것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대불사 경내 현판 ‘하화진위’. 한족(하화)이 흉노를 물리친 것을 자랑한다. 왼쪽부터 쓴 것으로 보아 나중에 만들어 붙인 듯하다. 바탕이 역시 파란색이다.

그러나 이슬람 모스크를 보면 파란색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이슬람 사원은 온통 파랗고 터키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도 파랗다. 어쨌든 이슬람은 파란색을 좋아한다. 이슬람이 좋아하는 색이 파란색이라서 서양인에게 파란색은 우울함을 준 것일까 생각해보곤 한다. 언어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무의식적, 의식적 가치가 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많다던 흉노는 다 어디로 갔나요? 이곳 장예는 원래 흉노의 본거지가 아니었나요?”

이번에는 ‘파란색’보다 더 직접적으로 ‘간쑤성 주민의 민족 문제’를 질문에 담았다.

“대부분의 흉노는 중국 한족에 동화됐지요.”

“그럼 이곳 장예 사람 중에는 흉노의 후예가 많겠네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럼 당신도 흉노의 피가 흐르고 있겠네요?”

“절대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 흉노 사람이 한족으로 흡수되면서 진(金)씨나 리(李)씨 성을 받았다는데….”

기분이 나쁜 듯 중국인 안내자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한 문제(기원전 202년~기원전 157년) 시대 환관이었다가 흉노에 귀순한 중항열이 한 말이 떠오른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흉노는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 등 예절이 없다’는 한나라의 비판에 중항열은 유목민족인 흉노의 사회상을 들어 한나라의 비판을 재비판했다. 20세기 서구에서 유행한 문화상대주의는 이미 기원전 흉노로 망명한 한족에게서 나타났던 셈이다.

그런데 중국인 리 선생은 자신에게 흉노의 피가 흐를 수 있다는 가능성에 아연실색하고 만다. 21세기 장예에서 만난 중국인이 보여준 태도나 전세계에 인종차별이 만연한 요즈음, 모두 한족 출신으로 흉노의 책사를 지낸 중항열의 이야기를 되새겨봄이 좋을 듯하다.

고원 위 정상에서 필자. 멀리 보이는 산이 바로 치롄산맥에 잇닿은 산이다. 유목민들이 판매하는 천으로 몸을 감싸야 한여름에도 세차게 부는 쌀쌀한 바람을 피할 수 있다.

글·사진 장운 자발적 우리 흔적 답사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