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술을 이용한 주민 참여는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효과가 더 좋을 수 있다. 서울시와 손잡고 정밀지도를 제작한 엔젤스윙(왼쪽부터 전술이, 박원녕, 서지숙)이 14일 오전 관악구 삼성동 쪽방촌 뒤편 공터에서 드론을 띄우고 있다. 사진 장수선 인턴기자 grimlike@hani.co.kr
지난해 12월29일 서울시 ‘천만상상 오아시스’에 이런 내용의 글이 올라왔다.
“드론(무인항공기)을 활용해 쪽방촌 등 취약지역의 현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밀한 생활환경 지도를 만들자. 이를 토대로 관공서와 엔지오 등이 취약지역의 생활환경 개선과 지역재생 사업을 효율적으로 벌이면 좋겠다.”
천만상상 오아시스는 서울시가 시민 아이디어를 제안받기 위해 운영하고 있는 누리집이다.
글을 올린 이는 서울대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던 박원녕(25·미국 조지아공대) 씨다. 그의 제안은 드론의 기술적 가치가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경험에서 비롯됐다.
미국에서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박씨는 2015년 1학기에 서울대 벤처경영학과의 ‘창업실습론’을 들으며 ‘엔젤스윙’이라는 프로젝트 팀을 만들었다. ‘천사의 날개’라는 뜻 그대로 세상을 날며 도움을 주자는 마음이 담긴 이름이다. 그해 4월 네팔에서 발생한 7.8 규모의 대지진이 엔젤스윙 탄생의 계기가 됐다. 대지진은 사망자만 8000여 명에 이르는 엄청난 피해를 냈다.
마침 미국 대학에서 무인항공기 공부를 했던 박씨는 “드론에 카메라를 달아 피해 지역을 정밀하게 확인하면 복구를 효율적으로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 수업을 함께 듣던 서울대생 전술이(25·정치외교학부) 씨, 교환학생 서지숙(22·캐나다 워털루대) 씨 등이 흔쾌히 동의했다. 드론을 직접 만들고, 정밀지도를 만드는 ‘맵핑’(mapping)이 엔젤스윙의 큰 방향이 된 것이다.
엔젤스윙은 석 달 만에 드론을 만들어, 지난해 8월 네팔 카트만두대학에 전달했다. 지난 1월에는 다시 네팔을 방문해 성능이 개량된 드론을 이용해 10~20명이 한 달간 쓸 수 있는 주사기·백신·진통제가 담긴 의약품 상자를 오지 마을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감이 생겼고,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세계 빈민가 정밀지도’(World Slum Map)를 만들어 보자는 꿈이다.
엔젤스윙은 그 첫 출발점으로 서울대 인근 관악구 삼성동의 쪽방촌을 잡았다. 박씨 등은 서울대의 지원을 받아 지난해 12월17일부터 고화질 카메라를 단 드론으로 삼성동 판자촌을 촬영했다.
서지숙 씨는 “드론으로 촬영을 하면 길바닥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까지 볼 수 있다. 구글 맵 같은 인공위성을 이용한 지도보다 정밀도가 10배나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건물이나 지형의 높낮이가 나타나는 3D 지도도 제작할 수 있다고 한다. 엔젤스윙은 이렇게 제작한 쪽방촌의 2D·3D 지도를 서울시와 소방재난본부, 쪽방촌 봉사활동단체에 기부했다.
박씨가 천만상상 오아시스를 통해 제안을 하자, 서울시는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서울시 공간정보담당관실은 “취약지역 생활환경 정밀지도가 있으면 주거지와 생활환경 개선, 사회 양극화 완화에 많은 기여가 될 것”이라며, 실행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내친김에 서울시와 엔젤스윙은 손을 잡았다. 취약지역 정밀지도 제작을 서울시 시범사업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이번에 대상이 된 곳은 쪽방촌으로 유명한 용산구 동자동이다. 동자동 쪽방촌은 11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전국 최대의 쪽방 밀집지역이다.
지난 3월11일 엔젤스윙은 쪽방촌 70여m 상공까지 드론을 띄웠다. 15분 촬영으로 6㏊(1만8000여 평)의 쪽방촌 일대를 담았다. 이렇게 마련된 쪽방촌 정보는 2D·3D 지도로 만들어져 서울시에 전달됐다. 서울시는 2D 지도를 도시락·쌀 배달, 노인 가구 청소 등의 봉사활동을 하는 자원봉사단체에 전달했다. 3D 지도는 동자동 지도 갱신 작업에 활용할 예정이다.
동자동 쪽방촌 일대를 3D로 제작한 지도의 모습. 장수선 인턴기자 grimlike@hani.co.kr
박씨는 쪽방촌 정밀지도가 여러 모로 쓸모가 많다고 설명한다. 화재 등 위험이 생겼을 때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과 없는 길을 손쉽게 구별하거나 휠체어가 다닐 수 없는 급경사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서울시 공간정보담당관실의 곽인선 주무관은 “쪽방촌 공간에 대한 정밀한 정보가 없어 자원봉사자들이 그동안 애를 많이 먹었다. 사회복지사들도 정밀지도를 매우 반기고 있다”고 말했다. 엔젤스윙은 틈틈이 동자동 쪽방촌을 방문해 주민들과 만나 겨울철 낙상 위험지, 범죄 발생지, 쓰레기 버리는 곳 등의 생활 정보를 정밀지도에 반영하고 있다. 이렇게 발전한 최종 정밀지도를 8월까지 완성할 예정이다.
박씨는 “현장의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는 현장의 시민들이 가장 잘 안다. 서울시가 시민의 아이디어를 수용해 현실 개선에 나서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박원녕·전술이·서지숙 ‘3총사’와 엔젤스윙의 처지도 달라졌다. 세 사람은 엔젤스윙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쓴 기술벤처 회사를 지난 4월18일 설립했다. 박씨가 대표를 맡았다. 드론이 사회 공헌뿐 아니라 산업 영역에서도 경제적 활용도가 높다고 판단해 도전을 결심했다. 서울대가 공과대학의 한 건물에 마련해 준 엔젤스윙의 사무실에는 ‘혁신 기술을 모두에게’라는 비전이 쓰인 펼침막이 걸려 있다.
글 정재권 선임기자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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