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푸른 숲에 간 사람들, 나무를 닮아 푸른빛을 품는다

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㉓ 서울시 구로구

등록 : 2021-04-22 15:53
시장통에서 바삐 움직이던 사람들도

봄 숲으로 가면, 조용히 봄이 된다

오랜 측백나무 봄물 올라 선명해질 때

항동철길 낡은 철로에도 봄이 흐른다

텃골 문학의 거리에서 매봉산 작은 고개로 올라가는 길.

연둣빛 신록이 숲을 덮었다.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푸르게 물들 것 같았다. 실제로 마음이 푸르러졌다. 낮은 산이 좋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 푹 쉬다 나온다. 매봉산 텃골 사람들이 그랬고, 온수도시자연공원 주변 마을 사람들이 그랬다. 항동철길 따라 걷다 만난 푸른 수목원은 ‘꽃대궐’에 신록의 성벽이다. 가리봉동 주택가 500년 넘은 측백나무도 지금 한창 봄을 긷고 있는지 푸른 나무가 더 선명하게 푸르다.

텃골 문학의 거리. 벽에 걸린 시를 읽으며 잠시 쉰다.

예술의 거리 지나 고개 넘어 매봉산 숲으로 들어가다


오류동 삼거리에서 고척로3길로 접어든다. 분식집, 세탁소, 식품점, 미용실, 이발소, 지물포…. 오늘도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 전봇대에 기댄 재활용품과 종량제 쓰레기봉투, 그 거리에서 생활의 편린마저 반짝이게 하는 건 한 편의 시였다. 한국문인협회 구로지부의 한 시인은 진달래, 민들레, 냉이꽃이 피어나는 구마루 언덕의 봄을 썼다. 노랑딱새가 노래하고 밤이면 풀벌레가 노래하는 곳도 구마루 언덕이란다.

구로 한묵회, 구로 미술협회, 구로 서예가협회, 구로구 사진작가회 등에서 제공한 각 분야 예술품들도 거리 곳곳에 전시됐다. 하얀 담벼락 작은 창문은 벽화의 일부가 됐다. 전봇대에 걸린 박두진 시인의 글 한 구절, ‘시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새로 출발하도록 고무하며 그 삶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다’. 어디 시뿐이겠는가. 그 거리의 모든 작품, 작품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거리를 새롭게 하고, 삶을 돌아보게 한다.

고척로 3길은 예술의 길이다. 그 길을 걸어서 ‘문학의 집·구로’가 자리한 ‘구마루 언덕’으로 오른다. 연둣빛 물오른 커다란 나무를 배경으로 빨간 꽃 노란 꽃이 피어났다. 지붕 낮은 집들이 숲에 깃든 둥지 같다. 담장 옆 나무로 만든 계단으로 올라간다. 어느 집 담장 앞에 자라는 탱자나무가 굵은 가시 사이에 꽃을 피웠다. 탱자나무 울타리 작은 초가, 고향 같은 시골 어느 마을 옛집이 생각났다. 구로구 오류동 매봉산으로 올라가는 고갯길이 정겹다. 옛날에는 이 마을을 텃골이라 불렀다. 오류동 가장 안쪽에 있어서 안동네라고도 했다 한다.

멀뚱하게 하늘로 솟은 아파트 옆, 생기 넘치는 연둣빛 숲으로 들어간다. 매봉산 산기슭 마을에서 숲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구마루 언덕에서 만났던 마을 아주머니들이 숲 그늘 아래 쉬고 있었다. 숲도 사람들도 다 푸르다. 나무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작은 솔숲을 지나 여러 갈래로 흩어진 길들을 이리 걷고 저리 걷는다. 숲에서 우연히 만난 왕벚나무는 숲의 꼭대기까지 가지를 뻗었다. 떨어진 꽃잎이 오솔길을 하얗게 물들였다. 정해놓은 목적지가 없으니 모든 길이 목적지다. 그 길에서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산책을 즐긴다. 동네 뒷동산이다.

500년 넘은 가리봉동 측백나무가 있는 정자마당.

500년 동안 마을을 지키는 가리봉동 측백나무

구로구 가리봉동 12-30, 500년 넘은 가리봉동 측백나무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예전 같으면 구멍가게가 있을 법한 고갯마루라고 생각하며 걷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을수퍼청과’라는 간판이 보인다. 그 앞 왕자문구 간판에서 옛 문방구의 추억을 떠올리며 내리막길을 걷는다. 길 오른쪽 손바닥만 한 쉼터에서 측백나무 고목을 보았다.

때마침 봄맞이 새 단장을 하는 중이었다. 막 자란 나뭇가지를 자르고 늘어진 나뭇가지가 더는 처지지 않게 고정한다. 나무 옆에 운동기구가 몇 개 놓였다. 마을 아저씨 몇 분이 운동기구를 차지하고 느릿느릿 팔을 돌리고 발을 구른다. 정자 그늘에 앉은 마을 아줌마들은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눈다. 측백나무 고목이 마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소소한 행복이다. 측백나무 고목이 잘 자라도록 나무 주변 집 두 채를 헐고 그 자리에 정자마당을 만들었다.

전에는 측백나무 고목에서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측백나무 한 그루가 더 있었는데 1945년 8월 죽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함께 그 마을을 지키던 측백나무 두 그루, 남은 한 그루 나무가 왠지 쓸쓸해 보인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 안에 큰 뱀이 살고 있었고, 나무를 훼손하면 큰 재앙을 맞는다”는 설화를 이야기한다. 오래전부터 해마다 정월 대보름과 한 해 농사가 끝날 무렵 마을의 평안과 사람들의 안녕을 빌며 제사를 지냈는데 한국전쟁 때 중단됐다. 맥이 끊어졌던 측백나무 제례는 2002년 다시 시작됐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 극복을 기원하는 마음도 함께 담아 제례를 올렸다.

측백나무 고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남구로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온수역에 내렸다. 온수역 8번 출구 앞에서 부일로7길을 따라가다보면 온수도시자연공원 벽산지구가 나온다. 봄 햇살같이 빛나는 아이들이 병아리처럼 재잘대며 뛰어논다. 봄 숲보다 더 생기 넘친다.

푸른 수목원 조팝나무 군락지와 봄이 무르익는 숲.

봄의 향연, 푸른 수목원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를 지나 숲으로 들어간다. 숲길 한쪽에 ‘유아동네숲터’라는 안내판이 있다. 낮은 산은 누구나 쉴 수 있는 쉼터다. 산 아래 마을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숲에서 쉰다. 솔숲 아래 낡은 의자는 언제부터 저곳에서 사람들을 쉬게 했을까?

연둣빛 숲이 초록으로 짙어지려는지, 몇몇 나무는 벌써 여름 티가 난다. 온수역을 가리키는 이정표 따라 내리막 숲길을 걷는다. 나무로 지붕을 지은 정자와 분홍빛 꽃이 어울린 풍경이 쉼표 같다.

온수역에서 천왕역으로 발길을 옮긴 건 순전히 항동철길과 푸른 수목원 때문이었다. 천왕역 3번 출구로 나와 직진한다. 광덕사거리를 건너면 바로 항동철길이다. 푸른 수목원 방향으로 걷는다.

항동철길은 1959년 생겼다. 12㎞ 정도 되는 기찻길이다. 기찻길 중 일부 구간을 사람들이 걸을 수 있게 꾸몄다. 구로구 오류동 광덕사거리 부근부터 푸른 수목원까지 구간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

서울 변방 마을 이면도로를 지나는 기찻길은 이질적이다. 기찻길을 따라 낯선 풍경 속으로 걷는다. 처음 어느 정도 구간은 빌라와 아파트 건물이 기찻길 주변에 보인다. 아이들은 기찻길에서 뛰어논다. 통통 튀며 쉬지 않고 달린다.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모습이 딱 봄이다. 건물이 끝나는 곳에서 기찻길 옆 풍경은 숲으로 변한다. 그렇게 기찻길을 걷다보면 푸른 수목원으로 들어가는 쪽문이 나온다.

수목원은 온갖 꽃이 울긋불긋 피어난 ‘꽃대궐’이다. 연둣빛 신록으로 뒤덮인 키 큰 나무들은 푸른 성벽이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아래 하얀 머리카락을 푼 할미꽃이 피었다. 고개 숙인 할미꽃을 보려 쭈그려 앉았다. 튤립도 여러 종류다. 꽃 앞에 ‘리틀 뷰티’ ‘튜버겐스 젬’이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수선화 군락지 뒤로 조팝나무 꽃이 하얗게 피었다. 신록 오른 큰 나무들이 그 배경이다. 이곳에 수목원을 만들기 전부터 있었던 시냇물 물길을 그대로 재현한 곳에서 수생식물이 봄을 맞이한다. 길가의 미루나무가 바람에 능청거린다.

항동철길의 봄은 기찻길 따라 흐르고, 푸른 수목원의 봄은 울타리 안에 가득 고여서 푸르다.

항동 철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