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민족 폄훼 티베트 여인, ‘우리의 차별’ 모습 겹쳐져…

길 위에서 만난 ‘우리’ ⑦ 중국 윈난성 나시족 문화가 가르쳐준 ‘가깝고도 먼 이웃’의 역설

등록 : 2021-06-17 14:52 수정 : 2021-06-20 09:37
옛 상형문자인 ‘둥바문자’ 만든 나시족

윈난성 최대 관광지 ‘리장 고성’도 세워

‘나시 음악’에서 느낀 고구려 벽화 춤

‘고대엔 한 음악 여러 길 전파’ 상상해봐


운전기사 티베트 여성, 나시족 비하 뒤

“우리는 넓은 범위 티베트계” 발언에 놀라

호남 차별과 조선족 차별 등 떠오르면서


‘가깝지만 먼 이웃들’ 다시 생각하게 돼

진사강이 흐르는 협곡으로 호랑이가 뛰어넘었다는 전설이 있는 호도협(후탸오샤). 바이족과 나시족의 묘한 긴장이 있는 곳이다. 몽골이 말을 타고 와서 이곳에서 바이족의 다리국과 대치했다고 한다.

2003년쯤 중국 광시좡족자치구에 들렀다가 좡족의 전통문화 공연을 본 적이 있다. 남녀가 함께 춤추는 장면에서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우리 춘향전에 나오는 ‘사랑가’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커졌다.

타이 고산지대와 윈난성 등지에 사는 라후족의 언어는 우리와 비슷한 게 많다. ‘너’와 ‘나’, 그리고 조사까지 유사하다고 한다. 그래서 고구려가 망하고 당나라에 의해 이곳까지 끌려온 고구려 유민 중 탈출한 사람의 후예라는 주장이 있다. 고구려 멸망 뒤 강과 산을 몇 개씩 건너 윈난성까지 왔고, 전통 옷에 강과 산을 그려서 자신들의 아픈 역사를 표현해온 민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2010, 푸른역사 펴냄)의 저자 김인희 박사는 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인 먀오족을 고구려의 후예라고 한다. 아울러 ‘치우가 동이족의 조상이고 먀오족이 그 후예’라는 이야기는 중국 당국과 먀오족의 이해관계 때문에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비판도 한다.

오랜 시간 듣고 본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소수민족이 가장 많이 사는 윈난성으로 필자를 이끌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2016년과 2017년 겨울 윈난성의 쿤밍-다리-리장-샹그릴라로 이어지는 길을 두 차례에 걸쳐 다녀왔다. 두 해 모두 겨울을 따뜻한 윈난성에서 보내게 됐다.

나시족의 성지 동파만신원 입구. 동파만신원에 있는 기둥이 이채롭다. 중국 한족은 세계를 반고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시족은 창세 설화에서 아홉 명의 남자 신과 일곱 명의 여자 신이 만들었다고 한다.

쿤밍에는 중국 소수민족을 모두 소개해주는 민족촌이 있다. 남부 원산(文山) 인근의 계단밭을 보러 가고도 싶었지만, 차마고도의 길을 따라 놓인 대리석으로 유명한 다리(大理)로 이동했다. 다리는 다리국이라는 독립국가를 이루었던 바이(白)족이 많이 사는 곳이다. 그들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흰색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몽골에 점령당하기까지 오랜 세월 독립적으로 살던 집단이다. 윈난성 북부에 흐르던 진사강을 건너지 못하는 몽골에게 양가죽 뗏목을 만들어준 나시족과 그래서 사이가 안 좋은 듯하다. 호랑이가 강물을 뛰어넘었다는 전설이 깃든 후탸오샤(호도협)를 사이에 두고 ‘왼쪽은 바이족, 오른쪽은 나시족’이라고 할 정도로 경쟁 갈등 관계이다.

나시족에 의해 건설된 리장(丽江)의 고성은 아마 윈난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일 것이다. 일처다부제와 독특한 상형문자인 둥바(東巴, 동파)문자와 둥바교까지 독특한 자신만의 문화를 가진 나시족은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나시족의 나시(納西)는 나시언어로 ‘검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이족은 흰색, 나시족은 검은색을 좋아한다.

‘시’는 나시어로 사람을 뜻한다. ‘흉노’의 베이징어 발음은 ‘슝누’이고 몽골어에서 사람을 뜻하는 발음은 ‘훙’이다. 몽골어 ‘훙’과 북경어 ‘슝’, 그리고 나시어 ‘시’가 그리 멀지 않은듯하다.

리장 고성에서 민속춤을 추는 나시족 여인들. 우리의 소고와 별반 다르지 않은 소고가 눈에 띈다.

나시족의 춤과 음악을 접하면 놀라움과 함께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리장 고성에서 두세 번 그들의 음악과 춤을 접했다. 한때 우리의 풍물을 배웠던 나로서는 그들의 손에 쥐어진 소고가 먼저 눈에 띄었다. 우리의 소고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시족의 춤 영상을 본 풍물놀이패 출신의 한 선배는 무릎을 구부리는 장면이 예사롭지 않다고 했다. 중앙대 전인평 교수는 고구려 벽화의 춤추는 장면을 분석하면서, 그 춤이 인도에서 신장위구르지역 카스를 거쳐 고구려까지 유입됐다고 주장한다. 인도에서 출발한 그 음악과 춤이 어쩌면 고구려와는 다른 경로로 이 나시족에게도 전달된 것은 아닐까? 문화라는 공간의 골이 깊고 뒤틀려진다 해도, 그 공간 속에서 다양한 문화들이 만나고 섞이는 것은 막지 못하는 법이다.

나시족의 전통 그림을 보면 모자에 새 깃털을 단다. 그래서 그들이 배를 타고 노를 젓는 그림은 흡사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림문자에 가까운 상형문자인 나시족의 둥바문자를 보면서 말과 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봤다. 소리가 의미가 된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인류가 100만 년 전부터 언어를 사용했고, 5천 년 전부터 문자를 사용했다면, 100만 년 전에서 5천 년 전까지 99만5천년 동안만큼은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소쉬르(1857~1913 )가 말하듯 ‘소리가 의미가 되는 것’이었을 거다.

그런데 문자가 만들어지고 난 뒤 그림문자나 상형문자를 사용하던 시절에는 ‘소리가 의미’가 아니라 ‘그림이 의미가 되는 시대’가 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림문자나 상형문자를 갖지 못한, 특히 유럽어족 사용자들이 페니키아의 소리글자(일종의 발음기호)를 빌려서 자신의 말을 소리글자 기호로 표현하는 시절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백사벽화 유적지 벽에 쓰인 둥바(동파)문자. 위 왼쪽에서 셋째 먹을 식자, 넷째 전쟁, 아래 왼쪽 넷째가 추울 량. 글자의 뜻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세계 유일의 현존하는 상형문자로서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에 등록된 둥바문자는 그냥 글이라 하기엔 단순화가 덜 된 그림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집트의 상형문자나 은나라의 갑골문자와 함께 이 나시족의 둥바문자는 서양의 언어학에서는 배제됐다. 이런 오래된 상형문자를 제대로 연구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말과 글의 관계’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잠겨본다.

윈난성의 두 번째 여행길에서 리장시에 있는 산맥인 ‘위룽쉐산’(玉龍雪山, 옥룡설산)을 거쳐 샹그릴라까지 운전해줬던 기사는 티베트 여인이었다. 아주 거친 입담과 괄괄한 성격 그리고 생활력도 강하고 고집도 센 티베트인이었다. 나이는 나와 동갑이지만 그 기세에 난 약간 움찔했다. 이 티베트인의 바이족과 나시족에 대한 평가는 아주 혹독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여러 차별적 언어가 떠올랐다. 한국에서 호남 지역 차별 발언 내용이나 선양 조선족의 연변 조선족 차별 발언 내용, 터키인의 쿠르드인에 대한 차별, 미국의 흑인 차별 발언 내용, 베트남인의 캄보디아인에 대한 차별, 일본인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 그 차별의 내용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가’ 싶을 정도로 비슷비슷하다.

그의 발언도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티베트인과 바이족, 나시족도 모두 민족적으로 비슷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차이를 말하고 묘한 갈등을 드러내다가도 “우리는 모두 넓은 범위에서 티베트계”라고 말했다. 멀고도 가까운 이웃들이다. 아니 가깝지만 먼 이웃들이다.

글·사진 장운 자발적 우리 흔적 답사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