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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155명의 ‘주거 인터뷰’ 터널에 전시”

성내천 보행교에 미디어아트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요’ 만든 송수희 작가

등록 : 2021-09-09 15:29
2015년 등단 뒤 소설가·기획자 활동

청약 신청 떨어진 날 아이디어 생각

시민들에게 삶과 거주의 의미 물은 뒤

LED 전광판에 25만 자 사연 흘려보내

송수희 작가가 2일 미디어아트가 설치된 송파구 방이동 성내천 보행터널 입구에서 작품의 의미와 내용을 설명한 뒤 사진 촬영을 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터널을 지날 때마다 ‘나만의 장소’라고 느꼈어요. 항상 내가 위로받는 지점이 성내천과 터널이 있는 이 공간이죠. 작가로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장소에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에요. 이런 운명적인 기회를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여겨 감사한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송수희(38) 작가는 지난 7월 송파구 방이동 성내천 보행교에 미디어아트 작품을 완성했다. 송 작가에게 성내천은 “마음의 고향”으로 느낄 만큼 특별한 곳이다. 2일 성내천 보행교에서 만난 송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성내천 부근에서 살았고, 중고등학생 시절 매일 걷다시피 할 만큼 성내천 길을 좋아했다”며 “성내천에서 얘기를 하면 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술이론과 미술경영을 전공한 송 작가는 소설가이자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송 작가는 2015년 단편소설 ‘히카리’로 계간 <21세기문학> 소설 부문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서울 중구 중림동을 소재로 한 사운드아트 <영영>, ‘3기 신도시’로 지정된 하남시 교산지구 주민들의 이야기를 채록한 <교산기록> 등의 작품을 통해 공간과 장소 속의 개인 서사에 관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이외 다수의 전시에 작가와 기획자로 참여했다.

송 작가가 만든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요?>는 부동산값 폭등으로 주거가 불안정해진 현실에서 시민들에게 삶과 거주의 의미를 묻는 시민참여형 미디어아트 작품이다.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요’라는 큰 주제를 미디어아트(보행교 터널), 사운드, 텍스트(책) 등 세 가지 형태로 표현했다. 미디어아트는 보행교 터널 천장에 설치된 발광다이오드(LED) 전광판에 시민 155명의 인터뷰 내용을 담은 25만여 글자를 흘려보낸다. 많은 전광판 패널은 터널 속에서 마치 은하수처럼 시민들의 이야기와 기억을 밝힌다. 송 작가는 “터널을 지나는 주민과 관객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이야기를 읽게 될 것”이며 “각각의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변을 완성하게 되는 것까지가 작품의 완성”이라고 했다.

“50여 년 전 시집올 때 해온 금가락지를 팔아 지금의 집을 장만한 70대 할머니, 집을 소유의 의미보다는 타인과 나눈다는 ‘방사시’의 불교 철학으로 생각한 청년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요.”

‘방사시’는 재물이 없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 중 하나로, 자신의 집을 타인에게 하룻밤 숙소로 제공하는 일 등을 말한다.

송 작가는 공간과 장소의 이동을 통해 개인의 삶을 말하는 ‘공간 생애사’ 개념을 바탕으로 시민들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았다. 집은 어떤 의미인지, 주거의 이동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등 삶과 거주의 의미를 묻는 10여 가지 질문과 답변으로 이뤄졌다. 송 작가는 “공간 생애사는 한 사람이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로 이동해 어떻게 살았는지, 그래서 공간의 이동이 내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집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부동산이나 투자로 돈을 더 잘 벌까 생각하죠.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만, 나는 내 일이 소중하고 오늘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굉장히 소중해요. 부동산 때문에 그런 시간을 많이 잃지는 않는지 등에 대한 생각을 사람들과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요?>는 서울시와 문화체육관광부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서울 25부작’ 선정 작품이다. 송 작가가 부동산(집)과 삶에 관심을 갖고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요?>를 만들 결심을 한 것은 아파트 청약에 여러 번 떨어지고부터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청약을 했지만 번번이 추첨에서 떨어졌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집값이 폭등했다. 송 작가는 아파트 청약에 떨어진 날 산책하면서 만난 이웃한테 ‘무주택자세요’라는 말을 듣고 ‘서울 25부작’ 응모 신청서를 냈다. 그는 “거대한 부동산 경제를 배경으로 개인 삶이 공간 속에서 어떠한 영향을 받는지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교차점을 짚고 싶었다”며 “거시적 역사의 제약을 수용하고 극복해내는 개인의 삶을 나타내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25부작’ 중에서 사운드와 텍스트까지 다루는 작품은 없어요. 이렇게 많은 인터뷰를 다양한 방식으로 만든 팀은 저희 팀뿐일 거예요.”

송 작가는 ‘서울 25부작’에 선정된 지난 2월부터 작업을 시작해 작품을 완성하는 데 꼬박 5개월이 걸렸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작품 기획부터 팀 구성 등 다양한 업무를 총괄했다. 송 작가는 “이렇게 큰 규모로 기획부터 제작까지 종합적인 역할을 해보기는 처음”이라며 “많은 사람에게 역할을 나눠주고 행정업무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좋은 경험이었지만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송 작가는 “뿌듯한 마음보다 혹시 ‘사람들이 싫어하면 어쩌나’ ‘고장 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며 “앞으로도 서사와 텍스트가 중심이 된 작업을 계속해가고 싶다”고 했다.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