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우리’

‘하나의 중국’과 ‘대만 독립’ 사이, 묻힌 소수민족 목소리

⑩ 아미족 등 소수민족의 열악한 환경에 가슴 아팠던 대만 여행

등록 : 2021-09-16 16:12 수정 : 2021-09-16 21:53
타이베이에서 동북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주펀(九分). 이 작은 마을이 일제시대 금광과 함께 번성했고, 쇠락을 밟다 영화 <비정성시> 촬영 뒤 관광지가 됐다.

선사시대부터 살아온 대만 소수민족

지하철에도 소수민족어 방송은 없고

사회적 목소리도 거의 못 내는 상황

공산당에 패한 장제스 국민당 세력은

‘하나의 중국’ 목소리 크게 내고 있고

명나라 때 이주해 온 한족 후예들은

민진당 중심으로 ‘대만 독립’ 목청 높여


‘하지만 원래 살아온 원주민 바람 뭘까

티베트인처럼 독립국 꿈꾸지 않을까?’

그들의 아픔, 가슴 속 깊숙이 다가올 때

소수 민족 가수 노래 선율이 심금 울려

북한에서 ‘조선은 하나다’라는 구호를 외친다면, 남한 사람들은 우리 민족의 통일 당위성은 인정하면서 ‘한국은 하나다’ 정도로 맞받아칠 것이다. 여하튼 우리의 경우 남북 어느 한쪽도 통일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어쨌든 코리아는 ‘하나’다.

그런데 과연 중국은 하나인가? 아니면 두 개인가? 혹은 더 나아가 세 개 이상인가?

중국 본토의 공산당과 대만의 국민당은 ‘하나의 중국’을 말한다. 분단된 중국의 통일을 강조한다. 단지 국민당 중심인지 공산당 중심인지만 다를 뿐이다. 그런데 대만의 민진당은 두 개의 중국을 말한다. 대만은 중국이 아니라 독립된 국가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만 원주민들의 입장은 또 다르다. 대만의 원주민들은 대만은 자신들의 고향이자 오랜 시간 거주해온 곳이기에 중국이라는 단어가 그들에게는 낯설 것이다. 마치 티베트인이나 위구르족처럼 자신들의 나라를 꿈꿀지도 모른다.

진과스(金瓜石). 철도를 건설하다 발견한 금광마을이다. 당시 광부들의 힘든 노동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

대만 소수민족인 아미족의 가수 일리 카올로의 씨디(CD) <마이 케어프리 라이프>에는 영어, 중국어 그리고 아미족 언어로 각각 부른 노래가 실려 있다. 대만의 현 상황을 말해주는 다언어 음악 시디라 할 수 있다. 대만 전철에서 안내 방송은 베이징어, 광둥어, 하카어, 민난어, 영어로 한다. 하카어는 중국 객가인의 언어이고, 민난어는 푸젠성 중심의 중국 방언이다. 소수민족의 언어로 나오는 안내 방송은 없다.

대만과 중국의 분단은 우리와 비견된다. 대만 분단의 아픔과 우리 분단의 아픔은 같은가 다른가? 대만에서 택시기사와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대화하다 다툼 아닌 다툼을 벌였다. 요는 일본이 대만에 들어왔을 때 일본에 저항했던 대만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내가 말했다. 50년간(1895-1945) 일본의 지배를 받은 대만 사람은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사실관계부터 확인해야 했지만, 그 택시기사는 “일본이 대만에 많은 것을 주었고 일본이 아니었으면 대만이 이렇게 잘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마치 나에게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정책으로 현재 한국의 경제 성장 결과가 나타났는데 일본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일본에 너무 적대적이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예류(野柳)지질공원의 기암괴석. 자연이 만들어낸 바위가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대만 사람과의 기억은 시작됐고 아직도 그 기억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대만에 들어왔을 때 대만 사람들이 일제에 저항했다는 사실은 대만 역사학자 치지아린(戚嘉林)이 지은 <대만사>라는 책에서 본 내용이었다. 책 내용은 처음 문장부터 흥미를 끌었다. ‘대만 역사의 주체는 누구인가?’로 시작한다. 그 주체는 셋으로 나뉜다. 아니 넷이다. 대만 이주의 시간적 차이가 결국 지금 ‘대만의 역사 인식의 지리학’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첫째가 대만의 선주민인 소수민족들이다. 아미족으로 대표되는 이들 선주민은 오스트랄로이드 인종이나 문화권에 속한다. 대만정부가 인정한 소수 민족의 수는 50개가 넘는다. 오스트랄로이드는 선사 시기부터 주로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오세아니아 등지에 선주민으로 존재했던 집단이다. 이들 소수민족은 가장 오래 살던 사람들이지만 대만에서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산속에 일부 사는 등 주류에서 멀어져 소외돼 있다.

대만에 가기 전부터 난 이들에게 관심이 갔다. 워낙 반골 기질이 있기 때문인지 어디를 가나 자연스럽게 소수자에게 관심이 먼저 갔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이슬람 사람이나 흑인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미국에 가면 네이티브 아메리칸이라 불리는 인디언을 만나고 싶었다. 중국에서는 항상 55개 소수민족을 찾으러 다녔고 터키에서는 쿠르드족을 만나려고 했다.

대만 택시기사를 만나 택시를 타자마자 갈 곳을 말한 뒤 처음 한 질문이 바로 이 “대만 선주민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였다. 기사는 내가 가는 목적지로 가는 길에 있다며, 가는 도중에 어떤 곳에 택시를 잠시 세웠다. 그곳에서 내리지는 못했지만 택시기사는 바로 저곳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사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눈에 들어온 것은 허름한 주택들이다. 그곳에 일렬로 선 주택들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남루한 옷을 입었다. 도시의 하층을 형성하거나 장사하는 차림새의 사람들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순간 불끈하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때 대만 택시기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사는 내가 왜 이런 곳을 가려고 하는지 의아해하는 듯했다. 온난습윤한 기후조건을 갖춘 대만에는 보기 좋고 놀 곳이 많은데 말이다.

예류공원. 16세기 포르투갈인이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포르모사(Formosa)로 부를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대만 선주민에 이어 두 번째로 대만 인구를 구성하는 집단은 명나라 때 중국 대륙에서 넘어온 사람들이다. 주로 푸젠성 사람들이다. 남명이 멸망하고 끝까지 저항하던 명의 장수 정성공(1624~1662)이 결국 대만으로 이주하면서 중국 한족의 본격적인 대만 이주가 시작됐다. 소위 민진당이라는 정당과 가오슝이라는 도시의 기반이 되는 인구 집단이다.

청이나 중화민국 이전 대만의 중심지는 남서 방면에 있는 타이난이나 가오슝이었다. 가오슝 사람들은 국민당의 독재 정치에 반대하며 저항한 역사를 가졌는데, 한국의 ‘님을 위한 행진곡’을 그들의 언어로 부른다. 광주광역시와 가오슝은 그래서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화롄(花蓮)의 타이루거(太魯閣) 협곡. 2000~3000m의 높은 산이 많은 동부의 협곡. 장징궈 전 국민당 총재가 고속도로를 건설하며 협곡에 다리를 세웠다.

세 번째로 대만 사람을 구성하는 집단은 청나라 때 넘어온 집단이다. 그리고 네 번째로 이주한 한족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국공내전을 벌이다 패배하고 이주한 부류인데 이들이 거점으로 삼은 도시가 지금의 타이베이다.

결국 가장 늦게 이주해 온 집단이 가장 큰 힘을 가지고 대만을 지배해오다 가오슝의 시민들을 학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후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 접어들었고 결국 민진당이 대만의 주류가 되는 상황까지 왔다.

국민당은 여전히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며 대륙과 대만은 통일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민진당은 대만은 원래 중국이 아니라며 통일의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른바 중국으로부터 대만의 분리 독립을 중요한 정책으로 지금까지 주장해오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아미족 같은 선주민들은 없다. 단지 일리 카올로의 음악 속에만 그들의 아름다운 노래와 선율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글=장운 자발적 ‘우리 흔적’ 답사가, 사진=박동욱 여행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