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촘 나뭇잎’ 통과한 햇볕은 고운 가루
흙 위에 쌓이면서 많은 생각 일으키고
가을비에 떨어진 낙엽이 안타까운 듯
길 가던 이, 돌무지에 돌 하나 얹는다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 계남근린공원 주변 여러 곳에 신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신트리’라는 이름이 궁금했다. ‘새로운 터’라는 뜻이었다. 신정산, 지양산, 능골산을 이어 걷기로 하고 출발 지점을 신트리공원으로 정한 건 그 이름 때문이었다. 옛 신트리마을의 뒷동산인 신정산, 신정산 서쪽 지양산, 지양산 북쪽 능골산을 하루에 돌아봤다. 숲도 다 달라 숲에서 받는 느낌도 다 달랐다. 그렇게 숲을 거닐었던 하루가 있었다.
신정산 숲길 초입. 다 영근 벼를 지키는 허수아비 가족
신트리마을 뒷동산, 신정산 숲길을 걷고 우렁바위를 보다
신트리 아파트 단지, 신트리 119안전센터, 신트리 어린이집, 신트리공원, 신기초등학교 등 양천구 신정동 계남근린공원 주변에 ‘신트리’ ‘신기’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꽤 된다. ‘신트리’와 ‘신기’는 같은 뜻으로, 새로운 터를 이르는 말이다.
서울지명사전에 따르면 계남근린공원 서쪽(신정산, 정랑고개 서쪽) 금옥여고 부근에 신트리(신기)마을이 있었다.(양천구 자료에는 ‘신트리에서 서쪽으로 신정산을 넘어가는 길목에 정랑고개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계남근린공원이 들어선 자리는 신정산이다. 신정산을 옛날에는 단산, 쪽박산이라고 불렀다. 나무가 없어서 산의 검붉은 흙이 그대로 드러난 것을 보고 붉을 단(丹) 자를 산 이름에 붙였나 보다. 지금은 숲이 우거졌다. 그 숲을 찾아가는 첫발을 신트리공원에서 시작했다.
부개역, 상동차고지와 63빌딩, 가톨릭대학교여의도성모병원 정류장을 오가는 700번 좌석버스를 타고 신트리공원 정류장에서 내렸다. 신트리공원으로 가는 길, 목동동로1길만 건너면 공원인데, 가로수가 터널을 이룬 그 길을 걷고 싶어 내키는 대로 걷다가 공원으로 돌아왔다. 신트리공원에도 나무 그늘 아래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다. 공원을 가장 크게 한 바퀴 도는 산책로가 500m 정도 된다. 그 길을 다 걷고 발길을 돌려 신정산으로 향했다.
지양산에 있는 밭. 산은 낮지만 물이 마르지 않아 예로부터 농사지었다고 한다
계남공원을 알리는 비석을 지나 신정산 숲으로 들어갔다. 다 영글어 고개 숙인 벼를 지키는 허수아비 가족이 숲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사람들을 반긴다. 느티나무가 모여 자라는 숲에 가을비에 떨어진 낙엽이 낭자하다. 단풍 물들기 전에 떨어진 낙엽 위 나뭇가지에는 아직도 푸른 잎이 무성하다.
유아숲체험장 앞길을 지나 은행나무 사이로 난 길로 걷는다. 계단 옆에는 잣나무와 소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갈림길에서 이정표를 만났다. 생태통로(정랑고개) 쪽으로 가야 하지만, 잠시 길을 벗어나 계단으로 올라간 이유는 울음소리를 냈다는 옛날얘기가 전해지는 우렁바위를 보기 위해서였다. 축구장 옆 한쪽에서 우렁바위를 만났다. 바위 네 개가 열십자 모양을 만들며 놓여 있었다. 산 정상에 있던 것을 배수지 공사를 하면서 지금 자리에 옛 모습 그대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서서울호수공원. 호수 수면에 능골산 산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정랑고개 위 생태다리 지나 사색의 숲길을 거닐다
갈림길로 다시 돌아와 생태통로(정랑고개) 쪽으로 걷는다. 잎으로 떡을 싸먹었다는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등 참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들이 숲을 이룬 길이다. 하늘이 열리는 곳에서 숲 밖 풍경을 본다. 숲이 하늘을 가리면 다시 오롯한 숲길이다. 흐린 날씨에 숲이 어둑하다. 비에 젖은 흙길이 검붉다. 붉은 산(丹山)이라고 불린 까닭이다.
신정산은 옛 신트리마을 뒷동산이었다. 지금도 산기슭에 사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낮은 산이 편하다. 모난 바위 없는 흙길이 부드럽다. 숲길이 모이고 흩어지는 숲속 넓은 터는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쉼터이기도 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숲 밖 아파트 건물을 보며 걷는다. 오솔길 옆에 돌무더기가 보인다. 옛날에 고갯길을 넘나들던 사람들의 기원을 전하기 위해 누군가 일부러 쌓은 게 역력했다. 정랑고개 위에 놓인 생태다리를 지난다.
정랑고개를 신트리고개라고도 불렀다. 신정산 중간을 동서로 넘나드는 고개였다. 지금은 신정로가 시원하게 뚫렸다. 고개 서쪽 금옥여고를 지나면 구로구 궁동, 경기도 부천시 춘의동과 작동에 닿는다. 인천으로 이어지는 육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생태다리를 건너면 신정산 북쪽 지역이다. 흙길 부근에 놓인 데크길로 걸었다. 데크길이 끝나고 흙길이 시작되는 곳부터 숲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동네 뒷동산처럼 편히 쉬기에 좋은 숲, 거칠고 메말라 불안한 숲, 어둡고 습한 숲, 보고 있으면 걷고 싶은 숲, 온화한 기운에 생각이 깃드는 숲 등 숲에 따라 느끼는 기운이 다른데, 이 숲은 온화해서 생각이 깃드는 숲이다. 숲속 넓은 터를 감싸는 숲 그늘과 부드러운 흙길, 흙에 떨어진 낙엽, 하늘을 가린 나뭇잎을 통과한 햇볕이 고운 가루가 되어 흙 위에 쌓이는 것 같은 느낌이 그렇게 만든다.
길은 계속 이어지고, 발길은 또 다른 숲으로 향한다. 그 길에서 청단풍과 소나무가 어울린 숲속의 숲을 만났다. 줄기가 가늘고 크게 자라지 않은 나무들이 이룬 숲은 초가집 천장 낮은 사랑방 같다. 아늑해서 따듯하다. 하산 길은 장수초등학교 이정표를 따랐다.
지양산 능고개와 서서울호수공원을 품은 능골산
금옥중·금옥여고·백암고등학교 정류장에서 신정현대아파트·서부트럭터미널 정류장 방향으로 가는 700번 버스를 타고 궁동삼거리 정류장에 내렸다. 눈앞에 앞으로 걸어갈 지양산 줄기가 보인다. 작동터널 쪽으로 걷다가 터널 위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올라간다. 숲길을 만나 우회전, 지양산 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걷는다.
지양산 남쪽 봉우리의 형국이 연꽃을 닮았다고 해서 고려시대에 그 언저리 마을을 연의마을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작동터널 위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바로 연꽃을 닮았다는 산줄기다. 그 길을 걷는 것이다.
숲속 길가 뿌리가 드러난 나무 옆 돌무더기에 지나가는 아줌마 두 분이 돌을 하나씩 얹는다. 머리는 조아리지 않았으나 돌을 얹는 손길에 정성이 느껴졌다. 누군가를 위해 빌고 또 빌어주는 사람들의 마음이 저렇게 쌓였다. 흙길도 부드러워서 내딛는 발걸음이 편하다.
이정표를 따라 올라선 국기봉은 시야가 트이지 않은 마당이자 쉼터다. 능고개 방향으로 걷는다. 숲길 옆 너른 밭에서 갖은 채소가 자란다. 지양산 숲에 안긴 신정자연텃밭농원이다. 예로부터 지양산은 산은 낮지만 골이 깊어 물이 항상 흘렀고 산기슭 사람들이 밭을 일구고 농사짓는 생활 터전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내력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리막 계단 옆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 까치울 터널 위 생태통로를 바라본다. 까치울 터널이 있는 곳은 옛날 능고개 고갯마루였다. 길은 터널 위 생태통로를 지나 북쪽으로 이어진다. 그 끝에 경인고속도로가 있고, 도로 건너편에 서서울호수공원을 품은 능골산 줄기가 보인다. 경인고속도로 신월IC 서쪽 언저리, 서서울호수공원 남쪽 어디쯤 달빛이 맑고 곱게 내려앉았다는 곰달래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서서울호수공원은 주변 마을 사람들의 쉼터다. 사람들은 호수 주변과 옛 정수장 건축 시설물을 이용해서 만든 공간을 많이 찾지만 호수를 품은 능골산 숲길도 좋다. 능골산 남쪽, 산을 바라보며 걷는 들길에 수양버들 한 그루가 눈에 띈다. 달빛 곱게 내려앉았다던 옛 마을이 그 언저리에 있었을 것 같았다. 출발했던 호수 주변, 무리 지어 피어난 구절초 꽃밭 앞에 도착해서 숨을 고른다. 해는 기울어 어둑해지는 시간, 달빛보다 먼저 호수 수면에 내려앉은 건 능골산 그림자였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