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수 화백의 그림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생 시절 들른 국립현대미술관에서였다. 우연한 기회로 가게 된 그의 회고전에서 여백이 주는 단정한 아름다움과 바다를 옮겨온 듯한 색감, 군더더기 없는 선과 구도에 압도됐다. 하지만 졸업에 취업에 이직까지 거치며 그때의 기억은 잊고 살았는데 종로에 와 이곳을 소개할 기회를 얻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 아니겠냐고 우겨보고 싶다.
종로구 옥인동에는 고예독왕(孤詣獨往, 홀로 가는 예술가의 길은 험하고 고독하다)을 신조로 평생을 화업에 바친 남정 박노수(1927~2013)의 집이 있다.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옥인1길 34·동그란 사진)이다. 박노수 화백은 도제식 학습이 아닌 현대식 대학교육을 마친 1세대 한국 화가로 특유의 화풍을 펼치며 한국 현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으로 꼽힌다.
종로구는 화백이 40여 년을 거주하며 작업했던 집에서부터 작품, 컬렉션 등 풍부한 예술품을 유족에게 기증받아 2013년 9월 구립미술관으로 재탄생시켰다. 품격 있는 소장품을 바탕으로 매해 기획전시뿐 아니라 정원음악회, 명사 초청 특강, 어린이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해 호평을 얻고 있다.
미술관은 본래 1937년께 지어진 절충식 기법의 가옥으로, 1973년 화백 소유 뒤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자료 1호(1991)로 등록됐다. 화가 개인의 기억이 깃든 장소일 뿐만 아니라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 또한 뛰어나다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화가의 집에선 앞뜰에 자리한 수석도, 작은 연못도 시선이 머무는 모든 곳이 작품이 되고 예술이 된다. 붉은 벽돌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화백에 대한 소개와 미술관 관련 영상, 작품을 전시한 장소가 차례로 등장한다. 1층은 응접실과 거실, 2층은 화실과 서재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한 사람의 반평생이 고스란히 녹아든 공간. 그의 살아생전 어느 날로 시곗바늘을 돌린 듯 일순간 감상에 젖는다.
현재 개관 8주년 기념전시 ‘화가의 비망록’이 한창인지라 특유의 원색적이면서도 맑은 색채가 돋보이는 다수 작품과 함께 박노수 화백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했다는 작가 조선희의 사진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를 대표하는 19 8 8년 작품 <산>(큰 사진) 속에 그려진 홀로 선 인물에게서 왜인지 화백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고독할수록 깊어지는 화가의 삶, 화가의 길.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기까지 평생을 읊조렸을 ‘고예독왕’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언제부터인가 대체 불가한 자신만의 글을 쓰고 그림 그리는 이들을 경외하게 됐다. 예술가에게 그게 얼마나 외로운 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일인지 알아서이다. 나 또한 나만의 글을 쓰고 나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 소망은 여전히 내 안에 가득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선물같은 고독감으로 충만한 가을이다.
이혜민 종로구 홍보전산과 주무관, 사진 종로구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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