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꼬여 있는 시간까지 호로록!

여름날 아이와 함께 만들어 먹는 냉라면

등록 : 2016-08-11 14:12

지난 가족모임 때였다. 아이의 한마디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할머니, 제가 밤에 자다 깼는데요, 엄마랑 아빠가 뭘 하고 있었는지 아세요?” 순간 바삐 움직이던 숟가락과 젓가락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모두의 눈이 두 배쯤 커져 있었다. “엄마랑 아빠가요, 글쎄 라면을 먹고 있는 거예요, 라면을!” 아이는 뾰로통하게 말했지만 다들 허허 웃으며 안도했다. 라면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아이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화를 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얼마나 맛있었으면 잠도 안 자고 둘이서만… 이건 배신이에요, 배신!” 또다시 분위기는 머쓱해졌고, 나는 당황했다. ‘라면은 몸에 안 좋으니까 먹으면 안 돼’라고 누누이 말해놓고 몰래 먹는 걸 들킨 그날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아이가 여섯 살 때 일이다.

요즘 아이는 부쩍 지난 일을 끄집어낸다. 데리러 온다고 해놓고 왜 안 왔는지, 동생 편만 든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동생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지금보다 자기를 더 사랑했는지 묻고 확인한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저런 상황을 들어 설명했다. “그날은 말이야”로 시작하거나 “아홉 살과 다섯 살의 차이” 같은 걸 늘어놓으면서. 이 방법이 시원찮았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어느 밤이었다.

아이는 계속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나는 왜 그러냐고 타박하듯 물었다. 아이는 몇 번을 망설이더니 짜내듯 한마디 했다. “난 불행한 것 같아.” 그때 깨달았다. 그 어떤 말에도 그냥 안아 줄 것을. 그럼 스르르 녹아 없어질 얼음이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딱딱하고 차갑게 굴었을까.

어제 어머님의 전화를 받았다. 더위에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지만, 여러 번 힘주어 하신 말씀은 아이들에게 맛있는 걸 많이 해 주라는 것이었다. 순간 어떤 음식 하나가 떠올랐다.

국에는 손도 안 대면서 라면 국물은 끝까지 들이켜고, 김치만 보면 인상을 팍 쓰지만 프라이팬에 달달 볶고 있으면 입을 아 벌리며 다가오는 아이와 딱 맞을 음식. 얼음까지 동동 띄우면 냉면도 부럽지 않을 냉라면이었다.

사실 어느 소문난 분식집에서 ‘여름맞이 신메뉴’라며 붙여 놓은 냉라면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먹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일지 않았다. 뜨겁지 않은 라면은 왠지 시시할 거 같아서. 그런데 웬걸, 연습 삼아 한번 만들어 봤는데 그 맛에 오감이 짜르르 반응했다. 라면은 시원하게 먹어야 제맛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꽤 괜찮았다.


오늘은 실전의 날. 아이가 돌아오면 짠, 하고 냉라면부터 내줄 생각이다. 탱탱하게 삶은 면발 위에 얼음조각을 담뿍 올리고 쫑쫑 썰어 볶은 김치와 삶은 달걀도 보기 좋게 올리려 한다. 구불구불 꼬여 있는 지난 시간을 호로록호로록 소리 내며 꿀꺽 삼킬 수 있도록. 아이가 미처 말하지 못한 지난날의 서운함까지 시원하게 비워진다면 작전 성공이다.

글 문보라 협동으로 랄랄라 블로그 운영진

사진 이지나 서울 iCOOP생협 조합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