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 프로젝트를 공동주관한 '억압받는사람들의연극공간-해'의 김현정 대표(사진 왼쪽 둘째)가 결과 공유회를 진행하고 있다. 인도, 필리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 해외 6개국에서 45명, 한국에선 10명이 화상회의로 참여했다.
한반도의 강수량 기록은 1770년부터
세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오래된 기록
“가뭄 오면 곡식 생산 줄어” 조세 예측
이전엔 비 오면 땅 파서 젖은 흙 쟀지만
문종이 세자 시절, 구‘ 리그릇 측정’ 제안
1년 뒤에 제작…장영실 발명설은 잘못
50~70㎝ 석대 위 둥근 구멍 파서 안치
바닥에 떨어진 빗물 튀어드는 것 방지
“내년 베트남 등 초등교에 측우기 설치”
11월27일 열린 웨이 프로젝트 진행 결과 공유회에서 한무영 서울대 명예교수가 측우기의 과학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한국과 해외 6개국에서 함께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한국 외교부가 민간 외교 활성화 차원에서 지원했다.
“한국은 1441년에 여기 보이는 것과 같은 측우기를 만들어 빗물의 양을 측정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의 강수량 기록은 1770년부터 존재합니다. 이렇게 정확하고 오래된 강우 기록을 가진 나라는 전세계에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서울 선릉역 근처 지하 강연장 무대 위에서 ‘빗물 박사’ 한무영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가 측우기 모형을 가리키며 열변을 토한다. 인도, 필리핀, 베트남, 스리랑카, 네팔, 방글라데시 그리고 한국 여러 지역에서 참석한 교육자와 학생 등 55명이 화상회의로 그의 연설을 경청한다.
11월27일 저녁 7시 열린 웨이(WA-Y, Water for All Youth), 즉 ‘모든 청년을 위한 물’ 프로젝트 진행 결과 공유회 자리. 한 교수는 “가뭄이 오면 곡식 생산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백성 세금을 적게 걷고자 세종대왕 때부터 강우량을 측정했다”며 “측우기는 최근 세계기상기구(WMO)가 규정한 표준에 맞을 만큼 정확하다”고 덧붙였다.
직접 제작한 측우기 모형은 영조 이후 만들어진 금영 측우기를 본떴다.
어떻게 580년 전에 만든 측우기가 현대의 우량계만큼 정확하게 강수량을 측정할 수 있는 걸까? 거기엔 어떤 과학원리가 숨겨져 있을까? 한 교수에게 측우기에 쓰인 과학원리를 물어봤다. 그는 영조 46년(1770년) 5월1일에 기록된 <조선왕조실록> 내용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기엔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 일풍일우(一風一雨)를 살피라고 명하신 성의(聖意)를 본뜬 것이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듣건대 <세종실록>에 측우기는 석대를 만들어 안치하였다고 하였다. 금번 두 궁궐과 두 서운관에 모두 석대를 만들되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척이요, 넓이는 8촌인 석대 위에 둥그런 구멍을 만들어 측우기를 앉히라.”
제목은 ‘팔도와 양도에 측우기를 만들어 우수의 다소를 살필 것 등을 명하다’. 1770년, 그러니까 251년 전부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강우 기록이 시작된 유래가 적힌 글이다. 영조는 구체적으로 단위도 언급했다. 포백척은 당시 포목을 재는 단위다. 다시 말해, 측정에 표준을 정한 것이다.
국보 제329호로 지정된 금영 측우기. 공주의 충청감영, 즉 금영(錦營)에 설치된 측우기라는 뜻이다. 국립기상박물관 소장품.
한 교수는 이러한 설계에서부터 측우기의 과학성이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우선 측우대를 보자. 50~70㎝ 높이의 석대 위에 측우기를 꽂아두면 바닥에 떨어진 빗물이 튀어 측우기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다. 또 관측하기도 쉬워 측정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
측우기 몸통에도 과학이 들어 있다. 한여름 낮에 검은색의 철통은 60도까지 올라가면서 직경이 넓어진다. 밤에는 20도까지 온도가 떨어지면서 직경이 돌아온다. 그런데 측우기를 측우대에 꽂으면 바닥 직경은 많이 늘어나지 못한다. 기온에 따른 측정 오차가 덜 일어난다.
3단 합체형 몸통은 증발의 영향을 줄여준다. 한 교수는 “측우기 바닥이 얕으면 햇빛과 바람 때문에 증발이 잘 일어난다”며 “당시 강수량으로 추정하건대 1단만 있어도 충분한데도 2개 단을 더 올린 건 증발을 줄여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측우기를 3개로 분리할 수 있으면 보관과 운반도 더 편해진다.
이러한 측우기의 너비와 높이는 세계기상기구 표준 규격에 딱 맞는다. 한 교수는 “조선시대의 측우기는 지금 그대로 설치해도 정확하게 강수량을 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부터 베트남 등 메콩 지역 5개국 초등학교에 한 개씩 측우기와 빗물 식수화 시설을 설치한 뒤 학생들이 직접 강수량을 측정하면서 빗물을 관리하게 하는 프로젝트를 외교부와 함께 수행할 계획이다.
조선시대에 어떻게 이렇게 과학적인 기구를 만들었을까? 당시 기록을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찾아봤다. 최초의 측우기 실험에 대한 언급은 세종 23년 4월29일, 즉 1441년의 기록에 남아 있었다. ‘황우의 변에 대해 승정원에 전지하다’라는 제목의 글 중 ‘구리 그릇’ 부분이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푼수(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다. 그러나 적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고인 푼수를 실험했다.”
여기서 ‘세자’는 문종 즉 세종의 맏아들 이향이다. 당시만 해도 비가 오면 땅을 파 젖은 흙의 깊이를 재는 방식으로 강우량을 측정했다. 흙의 성분, 주변 지형의 영향 때문에 정확한 측정이 어려웠다. 천문학에 밝았던 문종은 세자 시절 그릇을 만들어 강우량 측정을 푼수 즉 1푼 단위로 실험했다. 1푼은 현대 단위로 3㎜ 정도 된다. 그로부터 4개월 뒤 호조는 측우기 설치를 왕에게 건의했다.
측우기의 최종 형태가 정해진 건 세종 24년 5월이다. “쇠를 주조하여 기구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라 하니, 길이가 1척5촌이고 직경이 7촌”이라는 언급이 이때 나온다. 고안부터 실제 적용까지 1년1개월여 기간 너비와 높이를 바꿔가면서 실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측우기는 이후에도 꾸준히 개량됐다. 1837년 제작돼 국보 제329호로 지정된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크기는 높이가 31.2㎝, 직경이 14.5㎝다.
여기서 복습 퀴즈! 측우기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은 누굴까. 1번, 지금의 기상청에 해당하는 ‘서운관’에 근무했던 발명왕 장영실. 2번, 1442년부터 8년간 세종 대신 나라를 다스렸던 세자 이향. 지금도 일부 초등학생용 학습만화는 ‘장영실이 측우기를 발명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답은 2번. 이향, 즉 세자 시절의 문종이다. 여러 사학자와 연구자가 밝혀낸 결과다. 상식에도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글·사진 이경숙 과학스토리텔러
자문: 한무영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 사단법인 물과생명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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