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자연사박물관의 김지현 학예연구사가 '식물의 분류' 코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식물학자인 신혜우 작가의 ‘대자연’전
그림 한 장 속에 식물 한 생애 그려넣고
작은 개구리밥꽃, 송이버섯만큼 확대
우리가 못 본 식물의 다른 측면 보여줘
‘인간과 자연관’은 큰 리뉴얼 뒤 변신
콘셉트를 ‘생태계와 기후변화’로 잡아
식물들이 ‘빛에너지→화학에너지’ 전환
소멸 땐 동물 멸종…“미래 고민 필요”
“박물관은 지루해. 안 갈래. 책으로 다 볼 수 있어.”
방학을 맞이한 열 살짜리 딸은 신혜우 작가가 낸 <식물학자의 노트>를 펼쳐 들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1월30일까지 열리는 그의 ‘대자연’(Mother Nature) 전시회에 함께 가자고 며칠 동안 졸랐던 터였다.
식물학자이자 과학일러스트레이터인 신혜우 작가의 ‘대자연’(Mother Nature)전시회는 1월30일까지 서대문자연사박물관 1층에서 열린다.
식물분류학자이기도 한 신 작가의 그림은 일반 식물화와는 사뭇 다르다. 3차원의 존재를 2차원의 평면에 옮긴 그림 한 장 속에서, 씨앗이 싹트고 가지와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꽃이 피었다 시드는 한 세월이 보인다. 이런 과학적 엄밀함을 기반으로 그는 영국왕립원예협회 역사상 처음으로 금메달 세 개와 트로피 두 개를 연속 수상했다.
그는 일상적으로 볼 수 없는 희귀한 식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주변에 흔히 있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식물의 다른 측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숙주인 토마토를 어지럽게 휘감고 올라간 미국실새삼 줄기, 참나무 겨우살이 열매를 쪼개면 나오는 끈적한 과육, 누렇게 시들어가는 은단풍 나뭇잎에 생긴 구멍 등등.
그의 그림은 방송국의 자연 다큐멘터리 같다. 한 식물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종이 위에 옮겨놨다. 그림 한 장에 1년의 세월이 들어간 것도 있다. 어떤 그림은 연구논문 같다. 치밀하다. 여름철 수면을 뒤덮은 개구리밥 이파리 사이에 핀 개구리밥 꽃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을 만치 작으니까. 그 작은 좀개구리밥꽃의 수술을 그는 냉장고 속 송이버섯만큼 크게 확대해서 보여준다.
이걸 인쇄물 말고 원본 그림으로 볼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혼자 전시회가 열리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하 박물관)으로 갔다. 전시회장은 1층 중앙홀 한 편에 있었다. 신 작가가 그려낸 기묘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지루할 틈 없이 열렸다.
전시장엔 그의 식물화뿐 아니라 작품을 그리기 위해 쓴 확대경 등 도구와 밑그림, 색상 보존을 위해 그가 채색한 지렁이 등 동물표본들이 전시돼 있었다. 전시회장으로 아이들 넷이 우르르 들어오더니 재잘거렸다.
“우와, 뱀이다!”
“아니야, 지렁이야.”
“이 꽃 좀 봐. 이쁘다.”
“얘들아, 떠들면 안 돼. 이쪽에 더 큰 그림있다. 들어와봐.”
동행한 어른 두 명이 아이들을 이끌고 전시장 옆 ‘인간과 자연관’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따라 들어간 곳에서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만났다. 아이 키만 한 민들레, 숟가락만한 고사리 포자낭, 아이 머리통만 한 메타세쿼이아 열매…. 신 작가의 작품들이 벽화처럼 확대돼 붙어 있었다. 그것도 이해를 돕는 각종 장치, 설명 문구와 함께.
한 가족이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의 인간과 자연관에서 이끼식물 코너를 관람하고 있다.
그 코너에는 ‘빛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전환하는 생산자’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맨 앞엔 여러 식물의 사진을 제각각 담은 모니터들과 단추들이 있었다. ‘식물은 어떻게 분류되나요’라는 제목 앞을 지나던 부부가 앞서 걷던 아이를 불러 세웠다.
“이 단추 눌러봐. 그렇지. ‘관다발 없음’ 버튼. 사진들에 불이 들어오지? 그건 이끼식물이야. 이번엔 ‘포자로 번식’, 이 버튼을 눌러보자. 이건 양치식물들이네. ‘종자식물 중 꽃이 피는 식물’. 이건 속씨식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야.”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2인용식탁만 하게 확대된 우산이끼 그림과 확대경 아래 놓인 실제 이끼를 번갈아 살펴봤다. 부모는 이끼식물, 양치식물 등 코너별 설명을 찬찬히 읽어줬다. 겉씨식물을 지나 속씨식물 설명까지 듣고 나서 아이가 물었다.
“그러면 딸기는 뭐야? 겉으로 씨가 나와있으니까 겉씨식물이야?”
아이 아빠가 “잠깐만” 하더니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결과를 말해줬다. “딸기는 꽃이 피니까 속씨식물이야. 아까 저기서 단추 누른 거 기억나지? ‘종자식물 중 꽃이 피지 않는 식물’. 그게 겉씨식물이야.”
가족의 단란한 대화를 엿듣다가, 문득 딸아이가 저 아이만 하던 시절 이 박물관에 함께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식물 분류의 원리를 이렇게 재미난 방식으로 설명하고 세밀한 그림으로 보여주는 코너가 있었던가? 없었다.
김지현 학예연구사는 “1년이 넘는 준비기간을 거쳐 지난해 전시장을 대규모로 리뉴얼해 재개관했다”며 “특히 ‘인간과 자연관’의 콘셉트를 ‘생태계와 기후변화’로 잡으면서 생산자 코너를 기존보다 확장했다”고 설명했다.
“지구 생태계에서 ‘생산자’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구 생물이 쓰는 에너지의 근원은 태양의 빛에너지인데, 그 에너지를 지구 생물이 이용하게 해주는 생명체가 바로 ‘생산자’죠. 생산자의 대부분은 식물입니다. 광합성을 하는 세균 등 기타 생물들도 있지만 에너지 흡수량이 식물에 비해 미미하죠.”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태양에너지를 흡수해 화학에너지로 전환한다. 이 에너지는 초식동물 즉 1차 소비자를 거쳐, 육식동물 등 2차 소비자와 최종 소비자, 균계 등 분해자로 전달된다. 김 연구사는 ‘인간과 자연관’이 주는 메시지를 꼭 기억해달라고 덧붙였다.
“지구상에서 소비자인 동물이 사라진다 해도 식물은 푸르게 살아가겠지만, 생산자인 식물이 사라지면 모든 동물은 멸종하게 될 것입니다. 자연사박물관은 46억년 지구와 생명의 과거에 대해 공부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곳입니다.”
집에 돌아와 전시장 사진들을 딸한테 보여줬다. 박물관이 확 바뀌었다며 다음엔 같이 가자고 열변을 토하자, 딸이 새초롬하게 말했다. “그렇게 재밌었어? 그러면 엄마는 또 보고 와”라고. 하긴, ‘미래에 대한 고민’은 딸 세대보다는 나 같은 기성세대가 더 깊이해야 하니까.
글·사진 이경숙 과학스토리텔러
자문: 김지현 서대문자연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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